고대 그리스인이나 16세기 종교개혁자 캘빈은, 인간은 운명을 주관하는 신들의 손안에 있기에 그것을 변경시킬 수도 또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다고 하였다. 물론 고대 그리스인과 캘빈의 신은 다르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인간의 구원과 멸망은 신에 의해 사전에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고대와 중세의 인생관을 지배한 운명론이다
정녕 인간의 운명은 신에 의해 예정된 것인가?
얼마 전 시골 산골에서 칠십 대 후반의 노인이 일으킨 살인 사건이 있었다. 사건은 귀농한 외지인 노인과 지역민 스님과의 불화가 도화선이 되었다. 노인이 작성했다는 장부 안에는 ‘죽여야 할 사람들’이 기재되어 있었고 ‘능력이 되는 한 많은 사람을 사살할 계획’이라는 다중 살인 문구까지 있었다. 결국 노인의 총기 난사로 2명이 죽고 1명이 크게 다쳤다.
이 노인은 사전에 살인 예고를 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웃도, 면사무소도, 경찰서도 그저 그 말을 흘려 버리기만 하였다. 그들에게 그는 객지에서 굴러온 늙은이일 뿐이었다.
노인은 예고 한 대로 살인 행각에 나섰다. 먼저 분쟁 당사자인 스님을 찾았다. 스님과는 상수도 문제로 몇 번 다투었다. 총을 쏘았다. 사람을 향해 총을 쏘아보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스님이 쓰러졌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죽은 것 같다. 노인은 경황이 없어 시신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 후 스님은 병원에 실려 가서 목숨을 건졌다.
2차 목표로 향했다. 마을 이장이다. 전화를 걸었다.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마을에 없단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가는 길이다. 할 말이 있으면 오후에 만나자”고 했다. 이날 이장은 읍내에 볼일도 있고, 병원에도 가고, 겸사겸사 나선 것이다. 결국 이장은 목숨을 건졌다. 사람들은 이장이 운이 좋았다고 했다.
노인은 다음 목적지 면사무소로 향했다. 면장실에 들어가니 면장이 없다. 면장 역시 어머니를 모시고 도시의 큰 병원에 갔단다. 면장은 어머니가 평소에 당뇨합병증을 앓고 있어, 조만간에 병원에 모시고 가려고 하였는데, 어젯밤 꿈에 어머니가 나타났다. “얘야 병원에 좀 데려가 다오.” 꼭 생시만 같은 어머니 말씀에,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연가를 내고 병원에 간 것이다. 사람들은 어머니가 아들을 살렸다고 했다.
노인은 살인 대상자가 자꾸 없자 불안해졌다. ‘오늘 일이 안 되는 날인가, 꼭 죽여야 하는데.’ 다시 부면장을 찾았다. 보이지 않았다. 부면장은 담배를 피우려고 자리를 비운 것이다. 담배를 피울 때마다 흡연구역을 찾느라 “흡연자의 권리도 생각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불평을 하였는데, 오늘은 불편하던 흡연이 그를 살렸다.
‘모두가 피신한 것인가.’ 노인은 순간적으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폭발하지 못한 응어리는 심장을 터지게 할 것 같았다. 민원실 창구에 공무원들이 있었다. 조준했다. 딱히 개인적으로는 그들에게 감정이 없었다. 노인에게는 그들은 단지 자신을 우습게 아는 불특정 다수일 뿐이었다. 젊은 공무원 두 사람이 쓰러졌다. 두 번째 살인이었다. 팔다리의 힘이 풀어졌다. 눈앞에 시커먼 먹구름이 내려왔다. 이때 면사무소에 들어오던 다른 민원인이 노인의 팔을 붙잡았다. 면사무소 직원들도 달려들었다. 노인은 그들에게 제압돼 경찰에 넘겨졌다. 총을 맞은 면사무소 공무원 두 사람은 가슴에 총상을 입어 정신을 잃은 상태로 헬기로 이송됐으나 결국 숨졌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사건을 운명이라는 거울로 들여다보았다. 노인의 장부에 적힌 살인 대상자, 스님과 이장, 면장, 부면장이 살았다. 엉뚱한 젊은이 두 사람이 죽었다. 더구나 면장은 어머니가 간밤에 꿈에 나타나서 살았다.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충분히 이야깃거리가 될 법한 일이다. 이장 역시 그날 따라 병원에 갔기 때문에 살았다. 일련의 사태를 두고 운명론자들이나, 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말들을 많이 할 것이다.
우리의 운명이 예정되어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운명이 정해진 삶을 살아야 한다면 우리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얼마 있으면 새해가 시작된다. 새해에도 우리가 만들어 놓은 일상이 어제와 같이 변함없이 반복될 것이다. 일상 속에서 정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일탈하여 운명을 개척할 것인가는 오직 당신에게 달려 있다.

신동환

객원논설위원

전 경산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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