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가 지나고 나니 해가 떠 있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진 것 같다. 홍역 유행 소식 때문인지 병원 방문객이 줄었다. 오랜만에 여유롭게 진료를 마치고 동료와 함께 식사하러 갔다. 밥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안내방송이 들려온다. 적십자 혈액원에서 혈액을 구하러 출장차가 대기하고 있으니 가능한 직원은 헌혈에 동참해 달라는 것이 아닌가. “피(혈액)가 없습니다. 모든 혈액의 수급이 힘들고 특히 O형은 대구혈액원 보유량도 거의 없어서 받아 올 수 없어서 답답한 사정을 알립니다”는 알림도 받았다.
아무리 급해 피를 구해도 혈액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떠올라 마음 무거웠었다. 이 기회에 헌혈해야 하지 않으랴. 수저를 놓고 바로 헌혈 차를 향해 달려갔다. 전자 문진을 하고 혈압을 재고 난 다음 혈액 검사를 하였다. 사전 검사를 하던 직원은 뽑은 혈액의 색깔을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는다.
“어지럽지 않으세요?” “아니요! 아주 건강한 걸요.” 내가 자신 있게 대답하자 그녀는 나의 혈색소 수치가 낮아 수혈 불가라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 그럴 리가 없어요. 알코올이 마르고 난 다음 다시 채혈해서 검사해봐 주세요”라고 우기자 그녀가 다시 채혈했지만, 결과는 빈혈이었다. 혈색소가 12.5는 되어야 가능한데 그보다 한참이나 아래였으니…. 건강을 과신한 탓이었을까. 지난 몇 달 끼니도 거르고 바쁘게 다닌 후유증이었을까. ‘빈혈’이라는 이야기에 눈앞이 노래지는 것 같다. 어쩌랴. 잘 챙겨 먹고 빈혈에서 벗어난 다음에 헌혈할 수밖에.
나이 어린 한 직원은 몇 년 전부터 열심히 헌혈한 공로로 금장을 받았다. 그 이후 지속적인 헌혈로 명예의 전당에까지 이름을 올리지 않았던가. 그의 건강관리 비결을 물어보고 싶어진다. 얼마나 잘 관리하였기에 그리도 자주 헌혈할 수 있었던가. 그의 노력과 열정이 오늘 따라 무척이나 부럽다.
막내 애도 헌혈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에 헌혈차가 왔기에 달려갔더니 만 16세 생일이 되지 않아서 하지 못했다며 아쉬워하였다. 나이가 되면 헌혈부터 하고 싶다던 아이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다. 피를 나누는 것은 생명을 나누는 일이기에 그보다 더 고귀한 사랑의 나눔은 없을 것 같다던 녀석의 말, 헌혈 기념품을 받는 대신 그것마저 기부하겠다는 녀석이 참 대견하게 보이기도 하였다.
아무리 고귀한 사랑이라도 아무나 헌혈할 수는 없다. 헌혈이 가능한 나이는 만 16세부터 69세까지다. 헌혈은 실명제이기에 주민등록증이나 여권 등 관공서나 공공기관이 발행한 신분증도 있어야 한다. 신분증을 확인함으로써 헌혈자가 헌혈기록과 검사 결과를 정확히 관리할 수 있다.
헌혈하기 전에 상담과 함께 간단한 신체검사. 혈압과 맥박, 체온 측정과 혈소판 수 측정, 혈액형 검사, 혈액비중 검사도 한다. 혈압도 수축기 혈압 90mmHg 미만 또는 180mmHg 이상, 이완기 혈압 100mmHg 이상 맥박은 1분간 50회 미만이나 100회 초과, 체온 37.5도 초과 시에는 채혈하지 않도록 혈액관리법상 제한을 두고 있다. 체중 제한도 있다. 남자는 50kg, 여자는 45kg 이상이어야 수혈 가능하다.
과거에 피를 헌혈한 적이 있다면, 몸속 혈액이 재생되기 위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기에 바로 헌혈하기 어렵다. 피를 그대로 뽑아내는 전혈 헌혈의 경우는 2개월에 1회씩 가능하고, 혈액 중 일정 성분만 분리하는 성분 헌혈은 만들어지는 시간이 짧기에 2주 후에 한 번씩 가능하다. 질병이 있거나 특정한 약을 복용한 사람이 수혈한 피는 바이러스나 약물 성분이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일정 기간 제한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인플루엔자, A형 간염 등 예방접종의 경우는 24시간, B형 간염 예방접종은 2주가 지나야 가능하다. 누구든지 전혈 헌혈은 1년에 최대 5회만 가능하다. 나라에 상관없이 해외여행을 했다면 귀국한 지 1개월이 지나야 헌혈할 수 있다. 특히 말라리아 등의 질병의 위험이 높은 지역을 다녀왔으면, 그 여행 기간이 단 하루였다고 하더라도 1년 동안에는 채혈기를 이용하여 혈장만을 채혈하고, 나머지 성분은 헌혈자에게 되돌려 주는 헌혈인 혈장 성분헌혈만 가능하다.
헌혈하게 되면 우리의 몸은 내부, 외부의 신체 변화에 대해 뛰어난 조절 능력을 갖추고 있어 헌혈 후 1~2일 정도만 지나도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도록 혈관 내외의 혈액 순환이 회복된다. 자가진단을 통해 가까운 헌혈의 집을 방문하여서 한 생명을 살리는 헌혈을, 기적 같은 해가 되도록 기해년에는 당신의 사랑으로 생명을 살릴 기회, 헌혈을 실천해 보면 어떨까?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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