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옥산서원
-아버지의 이름으로-회재 이언적과 잠계 이전인
서원은 조선조 도학자이자 대유학자이자 정치가인 회재(晦齋) 이언적(1491 ~1553)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과 문인 및 경주 유림들이 세웠다.
서원 앞 개천을 건넌다. 옛날에는 입구에 있던 하마비를 옮겨 놓은 듯 계곡 건너편에서 하릴없이 서원을 지키고 있는 하마비가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준다.
한여름이면 제법 물살이 거셌을 것 같은 계류가 넓은 청석판을 깔고 흐른다. 회재가 세심대(마음을 씻는 곳)라 이름 붙였다.
외나무다리를 건너 정문에 이르니 역락문(亦樂門), 공자가 말한 군자의 3가지 즐거움을 이곳에서 느끼게 된다는 뜻이다. 조선 중기 문인 소재 노수신이 이름 지었다.
묵직한 돌계단을 딛고 역락문을 들어서면 정면 7칸의 커다란 2층 누각을 마주친다. 무변루(無邊樓)다. 가운데 3칸은 아래 위 모두 틔워 출입문과 대청으로 활용하고 양쪽 1칸씩은 벽체로 막아 아래는 아궁이와 굴뚝을, 위에는 온돌방을 들였다. 양 끝의 방들은 몸체에서 달아내어 누마루를 돌렸다. 벽을 허물어 외부 경관을 볼 수 있도록 한 보통의 누각과 달리 벽을 모두 닫아 대청과 누마루가 모두 막혔으니 무변루라는 이름을 무색하게 한다.
2층 대청 안쪽에 걸린 편액으로 심오한 뜻을 품은 이름이라 짐작할 뿐이다. 아마 편액의 한 편에 명필 한석봉이 썼다는 “모자람도 남음도 없고, 끝도 시작도 없도다. 빛이여, 맑음이여, 태허에 노니누나”라는 부기에서 무변루의 의미를 짚어본다.
무변루를 내려 계단을 올라서면 강당 격인 중정 구인당(求仁堂)이다. 정면 5칸 측면2칸인데 가운데 3칸은 마루를 틔웠고 양 옆은 무변루처럼 온돌을 놓았다. 그런데 온돌방 전체에 봉창 하나 없이 꽉 막아 놓았다.
가운데 걸린 커다란 편액 玉山書院(옥산서원)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되기 전인 54세에 쓴 것이다. “만력 갑술년(1574) 사액 후 266년 되는 을해년(1839)에 화재로 불타버려 다시 써서 하사한다”는 내용이 편액에 뚜렷하다. 서원 사액 당시 선조가 아계 이산해에게 명하여 쓰게 했던 것을 추사가 다시 쓴 것이다. 추사의 힘이 한껏 느껴지는 글씨체다.
대청 안쪽 구인당 편액은 한석봉이 썼다. 구인당의 동재와 서재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좁고 긴 맞배지붕 건물로 실용성이 가미된 서생들의 생활공간이었다.
강당 뒤에는 체인묘와 전사청이 있고 출입이 금지돼 있다. 구인당 뒤 왼쪽 체인묘 옆으로 회재의 신도비가 있는 비각이 있다. 비각 안 신도비는 퇴계와 사단칠정 논쟁을 벌였던 고봉 기대승이 짓고 글씨는 이산해가 썼다. 비석 위에는 두 마리 용이 휘감고 비석 아래에는 거북이 앞발은 땅을 굳게 딛고 버티고 있다. 서원 곳곳의 편액 글자 한 자 한 획이 모두 대가들의 솜씨 경연장이다.
◆ 회재 이언적
회재는 옥산에서 10km 떨어진 양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번(蕃)을 따라 양
동에서 옥산의 정혜사(지금은 국보 40호인 13층 석탑만 남아 있다.)를 드나들었고 그곳에서 공부했다.
벼슬에서 물러나서는 정혜사 옆 아버지가 기거하던 독락당에서 살았고 귀양지 평안북도 강계에서 독락당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생을 마감했다.
회재는 김굉필, 정여창, 이황, 조광조와 함께 동방오현으로 추앙받고 있다. 사후 후손들의 노력으로 문묘에 종사되고 있으니 유학자로서는 최고의 영예다.
‘밤새 안녕하십니까.’ 자고 일어나면 목이 붙어 있는지 확인해봐야 할 만큼 사화의 피바람이 몰아치던 조선조 정변기. 말 한마디, 잘못된 만남 한번이 생사를 가르던 살얼음 딛듯 아슬아슬한 시대, 회재는 2번이나 정변에 밀려 낙향한다. 그가 택한 곳은 본가가 있는 양동이 아닌, 10km 떨어진 독락당이었다.
중종 26년 1531년, 41세의 회재는 성균관 사간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중종의 사돈인 김안로에게 세자의 훈육을 맡기자고 했지만 회재는 그가 소인이라며 반대했다. 이 일로 파직되고 고향 독락당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7년 만에 불려 올라간다. 홍문관 응교로 다시 등용된 회재는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한성부 판윤, 이조판서, 경상도 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했다.
좌찬성으로 있던 명종 1년(1561년) 소윤과 대윤의 싸움이 극에 달한다. 역사에서 을사사화로 부르는 정파싸움에서 회재는 소윤의 편을 들어 공신이 되기도 했지만 파직되고 두 번째 귀향한다.
57세 되던 명종 2년, 양재역 벽서사건(수렴첨정하던 문정왕후를 비방하는 괴문서 대자보 사건)으로, 쫓겨 내려와 독락당에 은거하던 회재도 이번에는 비껴가지 못한다. 을사사화 잔당이 남아 사건을 일으켰다며 연루된 것이다.
그는 “군자는 죽음에 이르러도 놀라거나 원망하지 않는 법이다. 내 머리가 희기 전에 벼슬을 버리고 이 산에 돌아오리라” 하고 국경 근처인 평안도 강계 땅으로 유배된다. 그리고는 귀양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옥산서원 건립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주 양동마을의 옥산서원, 회재 이언적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고 배향하는 서원이다. 회재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정립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서원은 사액서원으로 임진왜란에도 병화를 면했고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은 서원 중 하나이다.
그 독락당 인근에 서원이 들어선 것이다. 아들 잠계 이전인과 손자 구암 이준과 치암 이순이 건립한다. 회재가 죽은 지 19년 지난 1572년, 회재의 학문을 기리고 뜻을 펴겠다는 뜻에서다.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전국의 47개 서원 중 하나였고 보물급 문서가 많은 서원으로 알려졌다.
창건 당시 향중 사림 13명이 서원 건립을 건의했다고도 한다. 당시 대사성 허엽의 서원 기문에는 “선생의 문인 구봉 권덕린과 손자 구암 이준의 노력에 의해 창건됐다. 경주 본주 읍민들의 협조와 경산군수를 역임한 손자 이준이 서원의 경제적 기반확보에 역할을 했다”고 적고 있다.
1574년 서원으로 승격되면서 선조로부터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는다. 처음엔 40여 칸이었으며 사당 강당 동재와 서재 누각 등으로 서원의 기본을 갖췄다. 1835년 판각이 불타서 다시 지었고 1839년 강당이 불나 이듬해 중건했다.
◆ 아버지와 아들
회재는 18세때 16세인 함양 박씨와 결혼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24살에 급제해 25살에 경주주관학교에 있을 때 감포만호 석귀동의 셋째 딸을 둘째 부인으로 맞았다.
사촌의 아들 이응인을 양자들이고 그는 양동 무첨당에, 둘째부인 양주 석씨에게서 난 아들 이전인은 독락당 주인이 된다. 면천한 석씨는 회재의 모친 손씨 부인을 노후에 독락당에서 지성껏 모셨다고 전한다.
서자 이전인은 회재의 귀양지인 평안도 강계에서 7년 동안 회재를 극진히 모시고 같이 학문을 논하기도 했다. 당시 회재의 학문적 성과는 아들 잠계 전인과 손자 준의 설득을 거쳐 퇴계가 인정하게 된다.
회재가 유배지 강계에서 대학장구보유, 예학의 선구가 된 봉선잡의와 구인록,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를 정리한 진수팔규를 지은 것도 모두 아들 이전인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 회재의 학문적 업적을 이루고 또 세상에 알린 것도 모두 이전인의 공이었다.
유배지에서 사망한 아버지 회재의 시신을 고향 옥산까지 운구해 온 것도 전인이다. 회재가 명종 8년(1553년) 11월23일 사망했지만 죄인이라 공개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상여는 석 달이나 걸려 이듬해 2월에야 고향에 도착했다. 당시 실세인 문정왕후를 피해 평안도에서 동쪽 강원도 태백을 거쳐 안동 청송 영천으로 운구해 왔다고 ‘회재 주손’ 이해철 (71)씨는 설명한다.
이전인은 문정왕후가 죽은 뒤인 1566년 회재가 중종 인종 명종 3대를 섬긴 충효를 상소해 회재는 죽은 지 13년 만에 사면되고 영의정으로 추증된다. 아들 이전인에게도 종1품 판사 벼슬이 내려진다. 그러나 이전인은 “아버지의 복작 만으로도 감사하다”며 병을 빙자해 사양했다. 이전인의 효성이 성인 회재를 가능하게 했다고 후손들은 입을 모은다.
◆회재 아들 잠계와 퇴계
퇴계는 생전 10살 위인 회재를 직접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잠계 이전인이 1560년 아들 준과 순을 데리고 퇴계를 찾아 회재의 행장을 부탁하고 학문적 성과를 확인받으면서 퇴계는 회재를 인정하게 된다. 이전인의 호 묵계도 이 때 퇴계가 지어준 것이다.
퇴계는 “선생의 학문이 이렇게 깊은 줄 몰랐다”며 “경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실토했다고 행장에 적었다. 퇴계는 “일찍이 선생이 그렇게 유도한 분인 줄 알았더라면 만나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하면서 아쉬워했다.
이단을 배척하고 정주학을 수립한 회재의 학문은 퇴계가 급성장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비로소 퇴계의 학문이 체계적으로 성립된 셈이라고 이해철 씨는 말한다. 이를 이르러 학계에서는 “무회재면 무퇴계”라 이른다고 이 씨는 강조했다. 세상에서 잠계가 없었다면 회재가 없었을 것이라는 말에 이어 회재야말로 퇴계의 학문을 성숙하게 한 밑거름이 됐다는 것이다. 퇴계가 쓴 회재의 행장은 5년 뒤인 1565년에야 완성된다.
퇴계는 회재의 진수팔규를 명종에게 올려 학문적 깊이를 평가했고 선조대에 회재의 복권을 주장하기도 했으며 기대승에게 부탁해 회재의 신도비명을 짓게 했다. 무회재면 무퇴계란 말이 유림 사이에 회자된 연유다.
◆옥산서원과 문화재
유물 보전과 관련해 주손 이해철씨는 “1970년대 경찰서 지인을 앞세워 유물 몇 점을 700만 원에 팔라는 제의를 받았다.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고 돌려보낸 뒤 그날 밤 한 숨도 못잤다. 당시 집을 두세 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궁색한 살림살이에 고민이 되기도 했다.
약속일이 되어 찾아 온 사람은 생각해 봤느냐고 했다. 머뭇거리니 포은의 시 한 편을 더 넣어서 900만 원 줄 테니 생각해보라고 했다”며 “조부가 총알을 무릅쓰고 난리 중에도 보관했는데 내가 이걸 팔고 어떻게 선조고 제사를 지내느냐는 생각으로 유혹을 뿌리쳤다”고 회고했다.
이경우
언론인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