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 서대선



찌르르/ 가슴에 젖이 돈다.//

잠결에도// 입을 오물거리는/ 어린 생명 하나

가슴에 안겨 오는/ 밝은 양지.......



- 시집 『레이스 짜는 여자』 (서정시학,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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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추위가 군데군데 머물러있으나 지난 설 하루 전날이 입춘이었다. 대지가 서서히 따스한 양의 기운으로 돌아섬을 알리는 절기이다. 절기는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도는 길인 황도(黃道)를 따라 15도씩 돌 때마다 황하 유역의 기상과 동식물의 변화 등을 나타내어 명칭을 붙인 것이라 한다. 옛사람들은 입춘에서 곡우 사이를 봄, 입하에서 대서 사이를 여름, 입추에서 상강 사이를 가을, 입동에서 대한 사이를 겨울이라 하여 사계절의 기본으로 삼았다. 이런 태양의 움직임에 따른 절기를 기준으로 일조량, 강수량, 기온 등을 감안해 농사를 지었다.

가끔 지인이 써준 입춘첩을 고맙게 받기만 했지 실제로 붙이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올해는 누가 정성스럽게 써 보내준 입춘첩을 현관문에다 붙였다. 봄의 온기를 찍어 보내준 것 같아 ‘찌르르 가슴에 젖이 도는’ 기분이었다. 입춘첩에는 모든 절기의 출발점에서 한해의 무사태평과 풍년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더불어 움츠렸던 겨울이 마감되고 봄이 시작되었음을 자축하는 뜻이기도 하다. 삶은 생각하기에 따라 언제나 입춘이긴 하지만 어떤 계기를 기점으로 마음을 한번 돌려세우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지난 삶에 매달려 전전긍긍하기보다 오늘부터의 새 삶이 중요한 것이다. 나날이 좋은 날은 자신에게 달려있다. 의식을 바꾸고 삶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사람은 그 순간부터 행복하리라. 이럴 땐 새해 새날이 그러하듯 얼마간 설레어도 무방하다. 지금껏 어깨를 짓누르던 삶의 짐들을 내려놓으면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울 것이고 마음속 빙점 하에 웅크리고 있던 의기소침도 기지개를 켤 것이다. 겨울 나그네가 외투 깃을 세우고 서성거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봄이 시작되니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도 많이 생기리라.

어딘가 녹지 않은 얼음과 한쪽에 개켜진 눈덩이들의 찌그러진 입자 사이에도 봄기운 머금은 햇빛이 시나브로 스며들고 있다. 숲속 어디에 슬어놓은 곤충의 알들이 꼼지락거릴 때, 자루에 담아두었던 마늘이 파란 싹을 틔우고 묻어둔 튤립 알뿌리도 꿈틀하는 것이다. 강둑 모과나무 가지 끝에는 연둣빛 잎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먼 산 능선으로 넘어오는 긴장 풀린 바람들이 세상의 모든 나뭇가지와 풀잎들을 조용히 흔들고 있다. 이러한 자연의 생명 현상 가운데서 사람이라고 변화가 없으랴. ‘찌르르 가슴에 젖이 도는’ 경험을 가져보진 못했으나 입춘과 완전히 부응하는 맥락이다. 어미의 젖은 ‘어린 생명’의 기원이며 본향이 아닌가.

김선우 시인도 “우물 속 어룽지는 별빛을 모아/ 치마폭에 감싸 안는 태몽의 한낮이면// 먼 들판 지천으로 퍼지는/ 애기똥풀 냄새”라며 ‘입춘’의 시를 노래했다. 나희덕 시인은 ‘어린 것’이란 시에서 “세상의 모든 어린 것들은/ 내 앞에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 나를 어미라 부른다/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 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고 했다. ‘가슴에 안겨 오는 밝은 양지’의 입춘 입질에 ‘입을 오물거리는 어린 생명 하나’로 인해 어미는 ‘젖이 도는’ 따스하고 촉촉한 상황을 수없이 맞이하리라. 오랜 세월 우리 몸 유전자 속에 존재했던 습성들.



박준우 기자 pj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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