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일반

신문지·헌 잡지 쓰던 시절 뽀삐·크리넥스로 우리네 화장실 풍경 바꾸다

<77> 신화가 된 제지인(製紙人) 이종대

이종대 유한킴벌리 초대 회장은 우리나라에 화장지 문화를 도입하고 대중화시킨 한국제지산업의 선구자다. 이종대 회장의 생전 모습.
지금은 ‘화장실’로 통칭하지만 예전에는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변소, 뒷간, 측간(厠間), 정랑(淨廊), 통시, 절에서는 해우소(解憂所)….

지금의 60, 70대 연령층만 해도 어렴풋한 기억 몇 조각쯤 있을 것이다. 뒷간 문 옆 철삿줄에 매달린 헌 잡지나 공책, 네모로 잘린 신문지며 누런 비료 포대 따위…. 특히 시골에선 지푸라기를 손으로 비벼 부들부들하게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고, 담장 위 박넝쿨 잎 두어장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심지어 새끼줄을 타고 앉아 해결하는 우스꽝스러운 광경도 있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같지만 불과 몇십 년 전 일이다.

그런 우리네 생활 풍경을 일거에 바꿔준 사람이 있다. 이 땅에 화장지 문화를 처음 도입해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시킨 제지산업의 선구자!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이종대(李鍾大) 유한킴벌리 초대 회장이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학생 이종대

1933년 5월 28일, 경북 금릉군 김천면의 농가에서 부 이규하와 모 이수연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마흔넷의 노산 탓인지 어머니는 막둥이가 첫 돌 지난 지 몇 달 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여섯 자녀를 키우며 새벽부터 밤늦도록 쉴 틈이 없었다. 누구랄 것 없이 가난했던 그 시절, 어린 종대는 학교까지 시오릿길을 운동화가 닳을까 봐 벗어들고 맨발로 뛰어가곤 했다.

해방 몇 달 전 김천중학교(6년제)에 입학했다. 졸업 후엔 경북대 사범대 물리학과에 들어갔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학생이었다. 대학 4학년 때(1954) 학장 추천으로 대구의 청구제지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가난한 제자가 수업 틈틈이 캠퍼스 내 신축공사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교수들이 눈여겨본 것이다.

청구제지는 직원 80명의 꽤 규모 있는 회사였다. 대학생 종대는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기술을 익히느라 모두가 퇴근한 후에도 혼자 남아 기계를 붙들고 끙끙거렸다. 행운은 일찍 찾아왔다. 이듬해, 대학 졸업 몇 달 후 스물둘 나이로 일약 공장장이 됐다. 기계에 매달려 열성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지켜본 사장이 입사 1년 된 신입에게 중책을 맡긴 것이다. 청구제지 사장은 자신의 혜안이 훗날 세계적 제지인(製紙人) 이종대를 만드는 출발점이 될 줄 알았을까.

신혼시절의 이종대 부부. 청구제지 공장장으로 일하던 1955년 결혼, 공장옆 사택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해 가을엔 세 살 아래 김경애와 혼인, 공장옆 사택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전기사정이 안 좋던 때라 공장에 문제가 생기면 한밤중에라도 뛰어갔다. 전기선 잇는 작업을 하다 감전돼 죽을뻔한 위기를 겪은 적도 있었다.

◆이탈리아 유학과 제지공장 생활

1957년 국비유학생으로 이태리의 제지회사 카르테라 부르고에서 8개월간 선진 제지기술을 배우던 시절의 청년 이종대.
누구에게나 평생 세 번의 기회는 온다더니 1957년 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종이 제조 전문기술을 배우기 위해 국비장학생으로 이탈리아로 가게 된 것. 카르테라 부르고(Cartera Burgo) 라는 회사에서 8개월간 제지기술을 배웠다.

2001년 한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문화적 충격이 컸다”고 말했다. 지푸라기를 사용하며 자란 그에게 화장지 문화는 생소했다. 가난한 조국의 현실에 눈물도 흘렸다. 하지만 언젠가는 한국에서도 질 좋은 화장지를 사용할 날이 오리라 믿으며 기술습득에 매진했다.

귀국 후 청구제지로 돌아온 그는 또 하나의 새로운 변화를 모색했다. 1958년엔 대구를 떠나 서울의 대한제지 생산부장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몇 달 후부터 월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때 결심했다. 언젠가 자신이 경영자가 되면 월급만큼은 제대로 주는 회사를 만들겠다고. 이듬해에는 정부주도로 볏짚 펄프를 만들기 위해 설립된 한국펄프에 스카우트됐지만 볏짚 펄프산업 자체가 백지화되고 말았다.

1961년엔 군산의 풍국제지 공장장으로 입사, 1963년에 국내 최초로 ‘주름 잡힌 화장지’를 만들어냈다. 서울업체들이 주름 잡힌 화장지를 전량 가지고 가서 가공․판매했다. 이후 한일제지로 옮겼지만 자금난 탓에 부도를 맞았다. 1960년대 당시만 해도 일부 부유층만 미군부대 등지에서 화장지를 사다 쓰는 정도였다.

자신의 회사를 갖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1965년 7월, 화장지 전문회사 ‘일우제지’를 안양에 설립했다. 하지만 자금난으로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이후 안양의 이화제지에 공장장으로 들어갔다.

◆화장지 제조기계 직접 만들다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다. 1966년, 그의 인생을 바꾼 터닝 포인트가 찾아왔다. 미국의 대표적 위생제지 기업인 킴벌리 클라크 본사의 관계자가 합작기업 물색과 시장조사차 한국에 왔다. 6년 전 네덜란드의 한 공장에서 만났던 한국인에게서 받은 명함을 갖고 있었다. ‘J.D.Lee', 바로 ‘이종대’였다.

그 무렵 그는 여전히 자기 사업의 꿈을 갖고 있었다. 킴벌리 클라크측은 합작대상인 유한양행에 “J.D.Lee가 합작회사의 리더로 참여해줄 것”을 요청했다. 1967년, 이종대는 유한양행 제지부장으로 입사했다. 합작과정에서 이견이 생겼다. 킴벌리 클라크 측은 한국의 화장지 수요량이 많지 않으므로 화장지 원단 제조기계를 일본에서 수입하자고 했고, 이종대 부장은 반대했다. 나아가 이 부장은 화장지 원단 제조기계를 한국에서 직접 만들겠다고 건의했다. 킴벌리 클라크와 유한양행 모두 반대했다.

하지만 그의 진지한 설득에 유한양행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 수용해주었다. 미국 측을 설득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해외출장때 눈여겨 봤던 기계 관련 자료를 모으고, 어렵게 설계도면도 입수했다. 철공소들을 돌아다니며 모은 부품을 밤새워 뜯고 맞추기를 계속했다.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그린 도면을 처음으로 미국 본사에 가지고 갔을 때는 비웃음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류머티스성 열병을 앓기도 했고, 사고로 손가락이 으스러져 6개월이나 깁스를 하기도 했지만 끝내 국산 화장지 원단 제조기계 1호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루 5t의 화장지 원단 생산이 가능했다. 직접 부품을 구해 조립한 기계라 설비비가 5만9천 달러 밖에 안 들었다. 저렴하게 만든 기계에서 화장지가 생산되자 미국 기술자들이 놀라워하며 한국의 기술력을 인정했다.

◆ 유한 킴벌리 설립과 다양한 제품 생산

1970년 3월30일, 3년간의 합작추진 끝에 유한킴벌리 회사가 설립됐다. 12월엔 제1공장이 군포에 들어섰다. 창립을 주도한 이종대 부장은 상무이사 공장장으로 취임했다. 크리넥스 미용티슈(1971), 뽀삐 화장지(1974) 등 우리에게 익숙한 생활위생용품들이 잇따라 출시되기 시작했다.

1980년 유한킴벌리 제2공장으로 설립된 김천공장 전경. 화장지․미용티슈․키친타월․부직포 등을 생산하고 있다.
1980년 3월엔 제2공장이 김천에 세워졌다. 킴벌리 클라크로부터 도입한 기계설치과정에 문제가 생겼는데 미국인 엔지니어들조차 해결하지 못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모두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당시 이종대 부사장이 밤새워 문제를 해결해 놓은 것이다.

1990년엔 배송센터를 겸한 제3공장이 성남에 들어섰고, 1994년엔 제4공장이 대전에 세워졌다. 화장지, 아기 기저귀, 생리대, 미용티슈, 물티슈, 키친타월, 부직포 등 유한킴벌리 제품들이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왔다.

작업복 차림의 이종대가 작업현장에서 직원과 작업 공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그는 탁월한 기업가이자 뛰어난 엔지니어였다. 그의 지휘 아래 우리 기술력으로 만든 기계들을 플랜트 수출까지 하게 됐다. 화장지 만드는 회사가 화장지 원단 제조 기계까지 수출한 것이다. 설계부터 제작과 설치, 시운전, 기술지도까지 일체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당시엔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했다.

1975, 1976년 제지용 건조 기계를 개발, 이란과 태국에 플랜트 수출 뒤 1976, 1977년에는 화장지 가공 기계를 말레이시아에 수출했다. 1977년부터 1993년엔 콜롬비아, 엘살바도르, 필리핀, 타이완, 태국, 사우디아라비아 등에 화장지 원단 제조기계를 수출했고, 1987, 1988년에는 호주에 부직포 제조기계를 수출했다.

◆제지산업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다

유한킴벌리의 매출 규모도 급성장했다. 1971년 2억 원에서 대표이사 사장 때인 1993년엔 2천392억 원을 돌파했다. 수출액도 1975년 25만 달러에서 회장직 퇴임 무렵에는 4억 달러에 이르렀다. 포상과 수훈도 잇따랐다. 대통령 표창(1978), 국무총리 표창(1980), 석탑산업훈장(1984), 철탑산업훈장(1994)….

국제적 명성도 더해졌다. 1990년 킴벌리 클라크사는 뛰어난 실적의 경영자에게 주는 ‘기업인성취 대상’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당시 킴벌리 클라크사의 125년 역사에서 수상자는 그를 포함해 6명뿐이었다고 한다.

1997년 동양인 최초로 ‘종이 노벨상’ 으로도 불리는 ‘세계 제지산업 명예의 전당(The Paper industry Hall of Fame)’에 헌정됐다. 왼쪽 두 번째가 이 회장.
다윈 스미스 킴벌리 클라크 회장이 친필 감사편지를 보내온 적도 있었다. “당신은 1억 명 중에 하나 있을 만한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종이 노벨상’ 으로도 불리는 ‘세계제지산업 명예의 전당(The Paper industry Hall of Fame)’에 1997년 동양인 최초로 헌정되기도 했다.

종이산업이 발달한 미국 위스컨신주의 인스티튜트 오브 테크놀로지에 있는 명예의 전당에는 1997년 당시까지 모두 35명이 헌정되었다. 이 회장은 생전에 “47년 제지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이라고 소회를 밝힌 바 있다.

◆치열했던 ‘종이 인생’ 47년

청구제지 견습공에서 유한킴벌리 초대 회장에까지 오른 성공신화의 주인공이었지만 그런 만큼 휴일․휴가를 모르는 워커 홀릭이었다. 남들이 쉬고 놀 때 한 번이라도 더 기계를 살피고 새로운 일을 연구하는 것이 그에겐 즐거움이었다.

아이디어맨이기도 했다. 원래 두루마리 화장지의 국제표준 규격은 114mm였지만 좀 줄여도 충분하겠다고 판단했다. 14mm를 줄여 100mm 폭으로 생산했더니 원가절감과 가격 인하, 원자재인 나무를 아끼는 효과까지 나타났다. 여러 국가가 화장지 폭을 줄이기 시작했다. 1984년부터 시작된 유한킴벌리의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캠페인도 점차 세계적인 환경보호 슬로건으로 자리 잡았다.

입지전적인 그의 삶의 여정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성경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성실함과 부지런함, 부단한 도전정신,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자세, 투철한 주인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노년의 이종대 회장이 맏딸인 이혜정 요리연구가와 함께 미소짓고 있다.
그는 가정적으로도 멋진 가장이었다. 1녀 2남의 자녀들이 ‘살아있는 교과서’로 여겨 닮고 싶어했던 롤 모델이었다. 맏딸은 요리연구가이자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는 ‘빅마마’ 이혜정 키친스토리 대표다.

‘최초’라는 기록들을 만들어 내며 한국 제지산업에 뚜렷한 획을 그었던 이종대 회장은 작년 11월27일 향년 85세로 별세, 경기도 안성의 천주교 공원묘지에서 영면에 들었다. 반세기에 걸친 그의 ‘종이 인생’은 치열했다.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그 열매를 향유하고 있다.

전경옥 언론인

연보

․1933년 경북 금릉군 김천면 출생

․1951년 김천중(6년제) 졸업

․1955년 경북대 사범대 물리학과 졸업

․1955~1959년 청구제지 공장장

․1959~1967년 한국펄프, 풍국제지, 한일제지, 이화제지 공장장

․1967~1970년 유한양행 제지기술 부장

․1970~1977년 유한킴벌리 상무이사(공장장)

․1977~1980년 유한킴벌리 부사장

․1978년 대통령 표창

․1980~1995년 유한킴벌리 대표이사 사장

․1984년 석탑산업 훈장

․1990년 킴벌리 클라크사 ‘기업인 성취대상’ 수상

․1994년 철탑산업 훈장

․1995~1998년 유한킴벌리 회장

․1997년 ‘세계제지산업 명예의 전당’ 헌정자로 선정

․1995~2004년 한국제지공업연합회 회장

․2018년 11월 27일 85세로 타계

홍석봉 기자 dghong@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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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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