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엄마/ 고혜정



사랑한다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힘들 때 왜 날 낳았냐고 원망해서 미안해/ 엄마 새끼보다 내 새끼가 더 예쁘다고 말해서 미안해/ 언제나 외롭게 해서 미안해/ 늘 나 힘든 것만 말해서 미안해/ 세상에서 제일 예쁜 딸 자주 못 보여줘서 미안해/ 늘 내가 먼저 전화 끊어서 미안해/ 친정에 가서도 엄마랑 안 자고 남편이랑 자서 미안해/ 엄마의 허리 디스크를 보고만 있어서 미안해/ 괜찮다는 엄마 말 100퍼센트 믿어서 미안해/ 엄마한테 곱게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내가 잘나서 행복한 줄 알아서 미안해.



- 에세이집 『친정엄마』 (함께,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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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들이 명절에 시어머니로부터 가장 듣기 좋은 말이 ‘어서 친정 가봐라!’인 반면, 가장 듣기 싫은 말은 ‘벌써 가려고?’라고 한다. 하지만 이 말도 몇 년 전까지였지 지금은 들어맞는 말이 아니다. 요즘 세상에 친정 가는 일로 시댁 눈치 살피는 며느리는 거의 없다. 명절날 가짜 깁스를 하고 시댁으로 오는 ‘야마리’ 까진 며느리도 있다지만 설거지 꺼리를 잔뜩 쌓아놓고 겉치레 말 한마디 없이 내뺄 궁리만 하지 않는다면 명절 당일이라도 친정 가야겠다고 하면 막을 시어머니는 없다. 하지만 고부 관계의 양상이 예전에 비해 엄청 변화했음에도 여전히 껄끄러운 관계인 것만은 분명하다.

‘봄볕엔 며느리를 밖에 내보내고 가을볕엔 딸년 내보낸다’는 말이 있고, ‘동지 팥죽그릇은 딸한테 설거지 시키고 대보름 찰밥그릇은 며느리한테 시킨다’는 옛말도 있는 걸 보면 아무리 딸처럼 엄마처럼 대한다 해도 친정엄마와 시어머니에 대한 정서가 따로 작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런 점만 보면 여자는 참으로 복잡 미묘한 존재다. 딸, 며느리, 시누이, 올케, 친정엄마, 시어머니가 한 몸의 역할일 수 있겠는데, 이토록 상반되고 대립된 감정을 가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가장 순연하고 뜨거운 사랑의 관계가 친정엄마와 딸의 사이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시집간 딸에게 친정엄마만큼 애틋한 존재가 세상에 또 있을까?

아낌없이 주고도 더 못 줘서 안달이고 한이다. 자기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 주는 사람이 친정엄마인데 딸은 가장 사랑하는 이가 엄마는 아니라며 미안해하는 연극 대사가 있다. 그 연극은 전라도 정읍 출신의 방송작가 고혜정의 에세이집 ‘친정엄마’가 원본이다. 이 책이 나온 뒤로 ‘친정엄마’는 연극과 뮤지컬,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져 큰 화제 몰이를 했다. ‘새끼 낳아서 키워봐. 그때 엄마 생각 날끼다.’ 이 말은 세상 모든 엄마가 세상의 모든 딸에게 하는 말이다. 때로 친정엄마 앞에서 딸은 버릇없고 고약하다. 하지만 딸과 친정엄마는 그저 마음으로 다 안다. 그리고 뒤돌아서 서로에게 미안해서 운다.

“아, 우리 엄마도 나를 낳을 때 이렇게 고생했겠구나!” 그들이 공유하는 출산의 고통을 남자들은 알 턱이 없다. 딸들은 종종 ‘엄마 땜에 못살아’란 말을 입에 담고 살지만 늘 맘속으로는 ‘엄마 때문에 산다’는 부르짖음의 다름 아니다. 혹여 이번 설에 시어머니가 친정 갈 기회를 주지 않았거나 곧장 자식 챙기는 일로 찾아뵙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전화해서 그저 “별일 없지? 이번에 못 가서 미안해, 다음 달 엄마 생일엔 꼭 갈게, 사랑해 엄마!” 그 정도면 다 되는 것이다. 엄마가 뿔이 날 일은 없다. 뿔의 싹도 나지 않으리라.









박준우 기자 pj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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