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키준 박사 경주지역 기미년 3·1만세 시위는 봉황대

“경주지역의 기미년 3·1만세 시위 장소는 봉황대 자리입니다.”

일본인이 경주의 기미년 3·1만세 시위 장소는 신한은행 사거리가 아니라, 봉황대 자리였다고 밝혀 귀추가 주목된다.



▲ 경주지역 3·1운동 장소는 신한은행 사거리가 아니라 봉황대라고 주장하는 아라키준 박사.
▲ 경주지역 3·1운동 장소는 신한은행 사거리가 아니라 봉황대라고 주장하는 아라키준 박사.
▲ 경주지역 3·1운동 장소는 봉황대라고 기록된 판결문.
▲ 경주지역 3·1운동 장소는 봉황대라고 기록된 판결문.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 제20권’에는 경주 3·1 만세운동은 신한은행 사거리에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현 독립기념관의 경주지역 만세운동 장소도 ‘신한은행 사거리’로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인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인류학박사 학위를 받은 아라키준 박사가 최근 “경주의 3·1만세 시위는 작은 장날이었던 1919년 3월 15일 봉황대 일대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아라키준 박사는 이어 “당시 경주의 만세 시위는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었던 것 같다”면서 “처음 3·1만세 시위는 3월 13일 큰장날 신한은행 사거리에서 계획되었지만, 사전에 일본 경찰에 알려져 무산되었다”고 설명했다.

그가 주장하는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조선총독부가 경주 만세 시위 사건 관계자들에 대해 재판했던 기록에서 드러난다.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의 조선총독부 3·1 독립 만세운동 주모자 공판 기록에 따르면, 보안법 위반 피고 사건에 대해 조선총독부 검사 하원달부가 구형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판결문의 기록은 “피고 박문홍, 박래영, 김학봉, 조기철을 각 징역 10월, 최수창, 이승태를 각 징역 8월, 김천근, 전성필을 각 징역 4월, 김성길, 박봉록을 각 징역 5월, 최성렬을 징역 6월, 김역근을 징역 3월에 처한다”고 주문했다.

아라키준 박사는 “국가기록원의 공식적인 자료의 오류는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경주지청의 판결문을 복사해 관계 기관에 제출하여 경주지역 3·1만세 운동 장소를 바르게 기록하도록 제안했다”고 말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관계자는 “아라키준 박사의 주장에 따라 판결문을 확인하고 현지 조사를 거쳐 당시 경주지역 3·1만세운동 장소가 봉황대라는 것을 확인했다”면서 “독립기념관과 국가보훈처 등 관련 기관에 자료를 제출한 상태로 곧 바르게 수정될 것”이라 말했다.

경주기독교연합회와 경주제일교회(이하 경주교회)는 3·1운동 당시 경주지역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이 추진되었다는 사실을 100주년을 맞아 시민들에게 알리고 나라 사랑하는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경주 3·1운동 100주년 기념식’을 계획하고 있다.

경주교회는 3월 16일 오후 2시 봉황대 잔디광장에서 1천여 명의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3·1운동 경주지역 영상물 상영과 세미나, 만세운동 재현 퍼포먼스와 거리행진 등의 기념행사를 추진한다.

경주시도 3월 1일 경주역에서 100주년 3·1절 기념식을 하고 화랑로를 거쳐 봉황대까지 시민대행진 행사를 할 계획이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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