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세상 지키는 ‘회화나무’ 곁엔 따뜻한 아랫목 지닌 ‘주막’…마치 오순도순 부부 같구나

발행일 2019-02-21 20: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2> 삼강주막



〈2〉삼강주막

주막집 곁에 회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겨울이어서인지 스산해 보였다. 회화나무 곁

에 주막집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햇살 때문인지 포근해 보였다. 오래 함께 오순도순 살

아 온 부부 같았다. 회화나무가 키가 훤칠한 영감이라면 주막집은 허리 굽은 아낙일 터.

수령 500세의 노거수와 100여 년 전 지어진 초가집이 부부라고 하기엔 나이 터울이 너무

크다. 부부이면 어떻고 가족이면 어떠랴. 나무는 바깥세상을 지키는 남성성의 상징이고,

집은 밥과 휴식의 아랫목을 가진 여성성의 상징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회화나무와 주막집은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166-1번지, 삼강나루터의 주인공이자 삼강주막 역사의 살아

있는 증인이라는 사실에 있다.

◆회화나무와 주막집

회화나무는 선비가 살고 있는 마을의 징표로 임금님이 하사해서 심은 나무라 전해지고 있

다. 300년 전 한 목수가 배를 만들기 위해 톱을 들고 베려하자 “이 나무를 해치면 네가 먼

저 죽으리라”는, 꿈에 나타난 백발노인의 호령으로 혼비백산했다는 전설을 가진 당산목이

기도 하다.

사실 삼강마을은 조선조 선비 청풍자 정윤목이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과 강학으로 후진양성에 힘썼던 마을, 청주 정씨의 집성촌이다.

주막집은 삼강나루 뱃사공과 등짐을 이고 진 보부상들의 숙식처였다. 시인, 묵객들이 ‘시

를 외우며 술을 마신 후, 빈 술잔을 띄워 보내 술을 권하는’ 유상처(流觴處)로 사랑받기도

했다.

방 두 칸과 다락, 부엌, 툇마루 등을 갖춘 8평 남짓한 조그만 집이다. 방마다 문이 셋

씩 달렸고, 부엌은 드나드는 문이 넷으로 되어있다. 길손들이 편하게 드나들 수 있고, 쉽

게 술상을 내어갈 수 있도록 배려해서 지은 우리네 전통 술집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1990년대 삼강주막. 예천군 제공
1972년 8월9일, 경북도로부터 보호수로 지정된 이 회화나무는 소금, 쌀, 잡곡 등의 물

물교환이 이루어지는 보부상들의 장터이자 세상인심과 이웃 마을의 안부를 주고받는 사

교장이었다.

더운 여름날엔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을 즐기거나 한담을 나누는 마을 사람들의 휴식처이자 학동들의 야외 교실이었고, 때로는 촌로들이 모여앉아 마을의 길흉대사를 의논하는 회의장으로 쓰이기도 했으리니 요즈음 식으로 굳이 말해본다면 자연이 만들어 준 컨벤션센터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만하겠다.

흐린 전설처럼, 고립된 섬처럼, 낙동강 1300리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마지막 주막, 삼강

주막집은 옛 시대상을 엿볼 수 있어 건축사 자료로서도 희소가치가 크다.

1900년경에 지은 당시 건물은 1934년(갑술년) 대홍수로 멸실되었으나, 마을 어른들의 증언과 고증을 바탕으로 2008년 복원했다.

주막으로서는 국내 유일하게 2005년 11월 20일, 경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삼강주막집은 주모 유옥연 할머니의 일생이 새겨진 공간으로도 유명하다. 2005년 9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유옥연 할머니의 삶의 이야기가 없었다면 삼강주막의 민속사적 가치는 반감되었으리라.

◆마지막 주모

겨울 끝자락 바람이 차가웠다. 늦은 점심으로 국밥과 막걸리 한 사발을 시켰다. 주막의 역

사는 언제부터일까? 젊은 날 김유신의 단골집으로 잘 알려진 신라적 천관녀의 술집부터

일까? 1097년 조선조 숙종 2년에 주막이 등장했다는 기록도 있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집이라는 대중가요에서 엿보듯, 주막이란 예로부터 삶의 애환이 깃든 우수(憂愁)와 해학(諧謔)의 공간이자 맹사성의 일화에서 보듯 풋풋한 인심을 나누어 갖는 친교와 소통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바, 정승 맹사성(孟思誠)이 고향 온양에서 한양을 가다가 용인의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주막에 먼저 들었던 시골 양반이 허술한 차림의 맹사성을 깔보고 ‘공’ 자와 ‘당’ 자를 말끝

에 붙여 문답을 하자고 청한다. 막히는 쪽에서 술을 한턱내기로 하자는 수작을 걸었던 것

이다.

맹사성이 먼저 “무슨 일로 가는공?” 하니, 시골 양반이 “과거 보러 가는당” 한다

“그럼 내가 주선해 줄공?” 하니, “실없는 소리 말란당” 한다. 며칠 뒤 한양의 과거장에서

맹사성이 그 시골 양반을 보고, “어떤공?” 하니, 시골 양반 얼굴빛이 창백해지면서 “죽어

지이당” 한다. 시골 양반 벼슬길은 그렇게 열리었다 전한다.

1932년, 유옥연 할머니는 열여섯 나이에 재 너머 우망 마을에서 시집을 와 청상이 된 뒤,

세 살배기 막둥이를 등에 업고 굶주림을 피해 주막을 찾아온다.

할머니의 나이 서른여섯, 글을 몰랐던 할머니는 불쏘시개나 부엌칼로 흙벽에 비스듬히 선을 그어 외상값을 표기한다. 이른바 할머니가 개발한 가내기 문자다.

보릿고개에 마신 술값을 가을 추수 후에 갚는 ‘가내기’는 초근목피의 당대에는 흔한 풍속이었다. 세로로 짧은 금은 막걸리 한 잔이고, 긴 금은 막걸리 한 되란 뜻, 외상값 다 갚으면 가로로 긴 금을 긋는다.

부엌 흙벽 외상장부에는 길고 짧은 금이 무수히 남아 있지만, 가로로 긴 금이 없는 것도 많다. 외상술값 못 갚고 할머니의 부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외상값을 치루지 못한 가내기문자의 주인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회화나무 곁에 둥근 돌들이 놓여 있다. 무게 120kg 안팎의 ‘들돌’이다. 들돌의식은

일반적으로 농촌의 청년이 장성하여 농부(어른)로서 자격을 인정받는 일종의 통과의례로

행해지던 것이다.

나루터에는 짐을 싣고 내리는 인부가 필요했다. 들 수 있는 돌의 무게에 따라 품값이 정해졌다. 보다 높은 품값을 책정받기 위해 건장한 사내들이 힘을 겨루었을 것이다. 무거운 돌을 들어 올려 장사급 품삯을 받게 된 사내들은 의기양양하게 나루터를 드나들며 생업을 꾸려갔을 것이고, 힘이 모자라 짐꾼으로 뽑히는 데 실패한 사내들은 의기소침하게 주막집을 찾아 술 한 잔 마시며 시름을 달랬을 것이다.

지우지 못한 가내기 문자의 주인 중에는 아마도 들돌에 실패한 사내들도 끼어 있을 것이다. 어찌 가내기 문자가 단순한 외상장부만이겠는가. 그것은 천관녀나 맹사성의 일화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낙동강의 마지막 주모 유옥연 할머니가 보고 듣고 겪은 한 많은 삶의 기록일 터이다.

◆나루터

삼강나루터는 강원도 황지에서 발원하는 낙동강, 봉화에서 흘러드는 내성천, 문경을 지나

온 금천이 한데 모여들어 '한 배 타고 세 물 건넌다'는 그런 곳이다.

남해안에서 올라오는 소금배가 안동 등 내륙지역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동안 머무는 곳이었고, 경상도 동남지역 사람들이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가는 주요 길목이었다.

예전엔 수량이 많고 수심이 깊어서 소 10마리를 한꺼번에 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배가 드나들었다. 보부상과 길손들의 발길이 붐비는 장날이면 나룻배가 30여 차례 다닐 만큼 분주한 곳이기도 했다.

1970년대 새마을 사업 이래 번성하던 나루터는 쇠락하기 시작한다. 나루터 아래쪽에 다리가 놓이고, 제방이 생기면서 나룻배도 없어지고 뱃사공도 노를 버리고 떠났다.

소금배가 오르내리던 삼강나루 그 자리에 거대한 현대식 삼강교가 새워지고, 이제 보부상으로 붐비던 삼강 옛 나루터는 삼강문화마을로 새 모습을 갖추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청산의 안개(靑山曉霧), 무지개 걸린 듯한 백석의 저녁연기(白石暮

煙), 비단에 수놓은 듯한 마령의 봄꽃(馬嶺春花), 강물 위에 비친 두무산의 늦은 단풍(西

壁晩楓), 뒷산 언덕에서 멀리 바라보는 산천(後提遠望), 속세를 떠난 도원경 같은 산막골

산장(山洞別庄), 맑은 모래 물가에 메어 놓은 배(淸沙繫舟), 동산에 떠오르는 보름달(東

山望月)!

아름다운 삼강팔경(三江八景)을 노래하며 빈 잔을 띄워 술을 권하던 유상영운처(流觴詠韻處)는 어디로 갔을까. 삼강은 묵묵부답 뒤돌아보지 않고 흘러가고 있었다.

유옥연 할머니마저 가고 없으니, 훤칠한 영감처럼 스산하게 서 있는 회화나무에게 술 한 잔 권하거나, 허리 굽은 아낙처럼 다소곳이 앉아 있는 주막집에게 마음의 귀를 열고 물어볼 일이었다.

강현국 시인


강현국(시인, 사단법인 녹색문화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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