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 문인수



그대 생각의 푸른 도화연필 같은 저녁이여,/ 시린 바람의 억새 사이사이가 자디잘게 자디잘게 풀린다/ 나무와 나무 사이/ 나무와 억새와 바위 사이가 또한 거뭇거뭇/ 소문처럼 번져 잘 풀리면서/ 산에 있는 것들 모두/ 저 뭇 산의 윤곽 속으로 흘러들었나/ (중략)/ 다른 기억은 잘 보이지 않는 저녁이여 / 세상은 이제 어디라 할 것 없이 부드러운 경사를 이루고/ 그립다, 그립다, 눈머는구나/ 저렇듯 격의없이 끌어다 덮는 저녁이여/ 산과 산 사이, 산과 마을 들판 사이/ 아, 천지간/ 말이 없었다 그대여/ 마음이 풀리니 다만 몸이 섞일 뿐인 저녁이여



- 시집『동강의 높은 새』(세계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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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푸라기와 잔가지 등속, 태워서 탈 것들은 죄다 끌어모아 불을 붙였다. 후후 입김을 불어 불이 붙은 불티들을 구멍 낸 깡통에다 쑤셔 넣었다. 얼굴도 쥐불도 벌겋게 달아오르면 깡통을 빙빙 돌려 달에 맞섰고 쟁반 같은 달을 그을렸다. 어린 그날의 잔영이다. 한 동무가 섣달 그믐날 복조리 장사로 목돈을 거머쥐었다는 풍문에 자극받아 가로 늦게 복조리 장사에 나섰다. 50개쯤 복조리를 떼 가져와서 담장이 높은 집만을 골라서 안으로 던졌다. 대보름날 수금에 나서긴 했는데 쭈뼛쭈뼛한 가운데서도 내 일생의 가장 담대한 용기로 ‘뻔찌’를 발휘했다.

그럼에도 1/3쯤은 반품되거나 떼 먹히고 말았다. 남은 복조리를 어머니에게 한 아름 안겨드렸다. 그리고 가벼운 감기를 앓았다. 이 무렵 날씨는 도통 종잡을 수 없다. 감기 걸리기 좋은 찬 기운이 대기를 지배하는가 하면, 어느새 완연한 봄기운이 촘촘히 서려 있다. 재해 수준의 폭설이 몰아치다가도 한편의 양지바른 곳에서는 노루귀며 봄까치꽃, 개불알풀 등의 야생화들이 제 모습을 오롯이 드러내 보인다. 봄을 기다리며 야금야금 하루씩 갉아먹는 동안 몇은 다른 세상으로 떠나고 또 몇은 새 생명을 얻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빠듯한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

2월이 무슨 공존과 경계의 계절인 듯 요즘 들어 부쩍 삶이란 ‘살다가 죽을 뿐’이란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공연히 남을 무시하고 남에게 해코지하거나, 남의 것을 탐내는 일만은 삼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남들도 그래 줬으면 하고 바란다. 어쩌면 그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고, 석가는 왕자의 자리를 헌신짝처럼 버리셨는지도 모른다. ‘생각의 푸른 도화연필’이 움직이는 방향을 나 자신도 알 수 없으나 기특한 그림이 그려질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마음이 잘 풀려 신간이 평온하길 바랄 뿐이다. 터무니없는 복이 굴러들어오기를 기대하지도 않거니와 잠자던 연애가 활성화되는 꿈도 꾸지 않는다.

시인은 2월에도 어디 ‘산과 산 사이, 산과 마을 들판 사이’에 당도하여 ‘저렇듯 격의 없이 끌어다 덮는 저녁’을 노래하고 있다. 2월의 풍경은 다른 달에 비해 조금 다른 느낌일까? ‘벌써’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없으리라. 새해를 맞고 달포 지나 다시 설을 맞는 2월은 ‘벌써’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며 엉거주춤한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게 한다. ‘자디잘게’ 풀리는 시간들이 이제야 ‘부드러운 경사를 이루고’ 내 몸에 섞여든다. 인디언들은 2월을 ‘홀로 걷는 달’이라며 ‘삼나무에 꽃바람 불고, 강에 얼음이 풀리는 달’이라고 하였다. ‘먹을 것 없어 뼈를 갉작거리는 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움이 트고 햇빛에 서리 반짝이는 달’을 보며 ‘아, 천지간 말이 없었다 그대여’ 찬양하고 수그린 몸 다시 곧추세워도 좋지 않은가 그대여.





박준우 기자 pj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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