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희/



봄이 포근하게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다. 강변에 늘어선 회색빛 나뭇가지에도 풀빛이 스민다. 먼 산은 아지랑이 하늘하늘 날아오를 듯 다정스레 다가든다. 남도에선 홍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머잖아 꽃놀이 갈 날이 기다려지는 봄이다. 희망에 부풀어 한껏 꿈을 꿀 수 있고, 무엇이든 시도해보고 싶은 의욕이 생기는 스프링(spring), 용수철같이 튀어 오르고 싶은 봄이다.

해가 많이 길어졌다. 햇살이 남아 있을 때 길을 나서다 보면 아들의 말처럼 정말이지 가슴이 터질 것 같이 좋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을 때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벅차오르지 않던가. 아이들의 표정도 따스한 봄날처럼 포근하다. 무슨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아 가슴 설레며 출근하였다. 이런저런 계획을 머리에 챙기며 장래와 순식간에 지나 가버린 세월을 새기며 아이들에게 눈을 돌린다.

날로 풀리는 대기의 온도처럼 따스하고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며 밀린 환자를 보고 나서 시장을 반찬 삼아 늦은 점심을 먹었다. 나른해진 몸과 정신을 달래려고 커피를 한잔 뽑아 드는데 오래 함께 근무한 동료가 서류를 들고 나타났다. 직장새마을금고의 이사장직을 맡고 있기에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면 날마다 직원들의 대출과 저축에 대한 결재를 해야 한다. 얼른 서류를 검토하고 도장을 찍으려는 찰나, 그가 지나가는 말처럼 이야기를 한다. “○○○원장님 상가에서 다른 새마을금고 직원을 만났는데 금리가….” 내 귀는 ‘○○○원장님 상가’라는 단어에 꽂혀버렸다.“뭐라고 하셨어요? 그분이 돌아가셨단 말입니까? 의사회에서도 부고 소식은 없었는데요?” 그러자 그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한다. 설이 지나고 나서 병원에 들러보니 의료원 초대 원장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우연히 들었다고 하였다. 늦게 알았지만 늦은 밤 바로 지인과 함께 문상을 다녀왔다고 하였다. 가족이 모두 경황이 없어 연락을 못 했던가 보다고 전하였다. 의료원 초창기부터 원장으로 십수 년을 한 곳에서 수많은 의사들을 들고 나게 하였었는데 낯익은 의사들의 얼굴이 별로 보이지 않아 그 직원도 내심 의아했으리라.

어찌 그리도 소식을 전하지 못하셨을까.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실 줄 알았던 큰 어른이었다. 구척장신에 건강은 자신하셨는데…. 언젠가 허리통증으로 고생하시다가 폐렴이 겹쳐 본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그때엔 손자들의 주치의라고 추켜세우곤 하시지 않았던가. 흔히 그렇듯이 움직이지 않으면 근육은 사라진다. 그다음엔 정신도 가물가물 해져 최근의 기억은 입력이 되지 않는다. 몸져누워계신 병실을 몇 차례 찾아뵈었을 때마다 그분은 생생하게 기억해내시고는“소아과 정 과장 아니가. 알지! 내가 왜 모르겠어!” 하시며 초롱 같은 기억력에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하였다. 그래도 오랜 기억은 잘 보존되어서 “원장님!” 하고 불러드리면 “응, 출근했나. 이 사람아 환자 열심히 봐야 해!” 말씀하시곤 하더니. 그러다가 입원 기간이 오래되고 또 바쁜 일이 끼어들어 지난 연말 이후 찾아뵙지 못하였다. 설날이 되자 폐렴 증세가 심해져 인지 기능이 심하게 떨어졌다고 한다. 그러니 가족들이 다 모였다 좀 나아지면 돌아가기를 반복하였을 게다.

수십 년 전에 미리 준비해 두셨다던 안동포 수의를 입고 가실 날을 기다리셨을까. 원장님은 구순을 훨씬 넘겨 백수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 수를 다하지 못하고 봄이 다가오는 이때 서둘러 먼 길 떠나셨다. 간절하다. 늘 아침이면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셔서 진료실을 다니며 과장들을 격려하고 환자가 밀려들어 밥도 못 먹고 진료하는 날에는 잊지 않고 들어오셔서 지폐 한 장씩 가운 포켓에 넣어주시며 “아이스케끼 사 먹어!” 라고 하셨던 원장님이다. 직원의 경조사는 하나 빠짐없이 참석하셔서 위로와 축하를 아끼지 않으시던 원장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못 뵈어 서운하기 짝이 없다. 사모님께 전화를 드리니 서운해 하셨다. 어쩌랴. 정신 좀 차리고 나시면 문상하는 수밖에. 까맣게 몰랐으니 말이다. 오해를 풀어야 하리라. 사모님은 늘 말씀하셨다. 한 조직의 장이라면 열두 폭 치마를 두르고 살아야 한다고. 허물이나 장점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모두를 감싸 안아야한다고.

몰라서 못 찾아뵌 것이지만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열두 폭 치마를 두르신 원장님과 사모님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리라. 어쨌든 봄이다. 봄옷처럼 날렵하고 상큼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새봄을 맞이해보자. 새로운 각오로 마음의 이사를 준비해보자.



박준우 기자 pj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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