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시哭詩 -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 / 문정희

발행일 2019-02-25 18:01:49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곡시哭詩- 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 문정희

한 여자를 죽이는 일은 간단했다/ 유학중 도쿄에서 고국의 선배를 만나 데이트 중에 짐승으로 돌변한 남자가 강제로 성폭행을 한 그날 이후 여자의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출생부터 더러운 피를 가진 여자! 처녀 아닌 탕녀!/ 처절한 낙인이 찍혀 내팽개쳐졌다/ 자신을 깨워, 큰 꿈을 이루려고 떠난 낯선 땅/ 내 나라를 식민지로 강점한 타국에서 그녀는 그때 열아홉 살이었다/ 뭇 남자들이 다투어 그녀를 냉소하고 조롱했다/ 그것도 부족하여 근대 문학의 선봉으로/ 새 문예지의 출자자로 기생집을 드나들며/ 술과 오입의 물주였던 당대의 스타 김동인은/ 그녀를 모델로 ‘문장’지에 소설 ‘김연실전’을 연재했다/ (중략)/ 처음 그녀를 불러내어 데이트 강간을 한 일본 육군 소위 이응준은 애국지사의 딸과 결혼하여 친일의 흔적까지 무마하고/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창설로, 초대 육군참모총장으로 훈장과 함께 지금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탄실 김명순은 피투성이 알몸으로 사라졌다/ 한국 여성 최초의 소설가, 처음으로 시집을 낸 여성 시인, 평론가, 기자, 5개 국어를 구사한 번역가는/ 일본 뒷골목에서 매를 맞으며 땅콩과 치약을 팔아 연명하다 해방된 조국을 멀리 두고 정신병원에서 홀로 죽었다/ (중략)/ 이제, 이 땅이 모진 식민지를 벗어난 지도 칠십여 년/ 아직도 여자라는 식민지에는 비명과 피눈물 멈추지 않는다/ 조선아, 이 사나운 곳아, 이담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보아라/ 피로 절규한 그녀의 유언은 오늘도 뉴스에서 튀어나온다/ 탄실 김명순! 그녀 떠난 지 얼마인가/ 이 땅아! 짐승의 폭력, 미개한 편견과 관습 여전한/ 이 부끄럽고 사나운 땅아!

ㅡ 계간 《문예중앙》 201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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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이자 시인, 번역가, 언론인, 배우였던 ‘탄실’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시는지? 김별아의 소설에도 조명된 바 있으나 이 시는 그녀의 기막힌 삶의 내막을 소상히 적고 있다. 그 불행한 생은 어머니가 평양기생 출신 소실이었다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격적인 불행의 발단은 도쿄 변두리 숲에서 산책하던 일본군 소위 이응준(초대 육군 참모총장)으로부터 데이트 강간을 당하면서부터이다. 그 충격에 자살까지 시도했으나 당시 언론은 오히려 김명순이 이응준을 짝사랑하다가 실연당한 것으로 왜곡 보도했다.

김동인은 소설에서 ‘더러운 여자’ ‘남편 많은 처녀’라고 조롱하는 등 자유분방한 성품이 빚어낸 사건인 양 그녀를 묘사했다. 당시 남성 문인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인해 그녀는 삶을 추스르고 재기할 기회를 잃고 내동댕이 쳐져 풍화되어 잊혀졌다. 여비가 없어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곤궁했고 피폐해졌다. 비참한 말로를 걷다가 1951년 도쿄의 한 정신병원에서 어두운 생을 마감한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쯤은 ‘진혼’이 되어 그 ‘조선’을 용서할 수 있을까. ‘아직도 여자라는 식민지에는 비명과 피눈물 멈추지 않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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