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를 죽이는 일은 간단했다/ 유학중 도쿄에서 고국의 선배를 만나 데이트 중에 짐승으로 돌변한 남자가 강제로 성폭행을 한 그날 이후 여자의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출생부터 더러운 피를 가진 여자! 처녀 아닌 탕녀!/ 처절한 낙인이 찍혀 내팽개쳐졌다/ 자신을 깨워, 큰 꿈을 이루려고 떠난 낯선 땅/ 내 나라를 식민지로 강점한 타국에서 그녀는 그때 열아홉 살이었다/ 뭇 남자들이 다투어 그녀를 냉소하고 조롱했다/ 그것도 부족하여 근대 문학의 선봉으로/ 새 문예지의 출자자로 기생집을 드나들며/ 술과 오입의 물주였던 당대의 스타 김동인은/ 그녀를 모델로 ‘문장’지에 소설 ‘김연실전’을 연재했다/ (중략)/ 처음 그녀를 불러내어 데이트 강간을 한 일본 육군 소위 이응준은 애국지사의 딸과 결혼하여 친일의 흔적까지 무마하고/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창설로, 초대 육군참모총장으로 훈장과 함께 지금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탄실 김명순은 피투성이 알몸으로 사라졌다/ 한국 여성 최초의 소설가, 처음으로 시집을 낸 여성 시인, 평론가, 기자, 5개 국어를 구사한 번역가는/ 일본 뒷골목에서 매를 맞으며 땅콩과 치약을 팔아 연명하다 해방된 조국을 멀리 두고 정신병원에서 홀로 죽었다/ (중략)/ 이제, 이 땅이 모진 식민지를 벗어난 지도 칠십여 년/ 아직도 여자라는 식민지에는 비명과 피눈물 멈추지 않는다/ 조선아, 이 사나운 곳아, 이담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보아라/ 피로 절규한 그녀의 유언은 오늘도 뉴스에서 튀어나온다/ 탄실 김명순! 그녀 떠난 지 얼마인가/ 이 땅아! 짐승의 폭력, 미개한 편견과 관습 여전한/ 이 부끄럽고 사나운 땅아!
ㅡ 계간 《문예중앙》 201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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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이자 시인, 번역가, 언론인, 배우였던 ‘탄실’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시는지? 김별아의 소설에도 조명된 바 있으나 이 시는 그녀의 기막힌 삶의 내막을 소상히 적고 있다. 그 불행한 생은 어머니가 평양기생 출신 소실이었다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격적인 불행의 발단은 도쿄 변두리 숲에서 산책하던 일본군 소위 이응준(초대 육군 참모총장)으로부터 데이트 강간을 당하면서부터이다. 그 충격에 자살까지 시도했으나 당시 언론은 오히려 김명순이 이응준을 짝사랑하다가 실연당한 것으로 왜곡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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