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히지 않는 그 날의 함성, 구미 진평동 독립만세운동 100주년

발행일 2019-02-28 15:12:57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1919년 3월12일, 진평동 뒷산에서 마을주민 300여 명 모여 만세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19년 3월11일.

구미시 진평동(인동) 이상백의 집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초저녁부터 사람들의 눈을 피해 동네 청년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상백과 이영식, 이범성, 이내성, 이영래, 임점석, 임용섭, 박명언, 권영해, 허도언 등 피 끓는 청춘들이었다.

이상백의 손엔 며칠 전 이영식이 건네준 ‘독립선언서’가 들려 있었다. 나흘 전인 3월7일 대구계성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영식이 찾아와 독립만세운동 동참을 호소하며 건네준 것이다. 이영식은 기독교 신자로 동네 유지였던 이상백의 도움이 필요했다.

마침 국권 회복을 간절히 바랐던 이상백과 함께 있던 이내성은 그 자리에서 이를 수락했다. 이상백이 수락하자 거사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거사일은 12일로 잡았다.

다시 11일 밤. 이상백과 임용섭은 독립선언서 필사를 맡았다. 그리고 이영식, 이영래, 임점석은 거사 당일 사용할 태극기를 밤새도록 그렸다.

그렇게 운명의 날이 밝았다. 박명언과 허도언은 오후 8시 동네(진평동) 뒷산에서 독립만세를 부른다는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필사한 독립선언서를 각 마을 주요 자리에 붙이도록 부탁했다.

당시 3·1운동 후 전국에 들불처럼 일어나는 만세운동에 인동지역 일본군 헌병주재소도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일제는 군경을 마을마다 배치하는 등 삼엄한 감시를 펼쳤다.

드디어 12일 저녁 8시. 박명언과 허도언으로부터 거사 소식을 전해 들은 마을 주민들이 삼삼오오 마을 뒷산으로 모여들었다.

이상백은 분연히 일어선 동민들 앞에 나서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우리나라도 멀지 않아 독립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스스로 독립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세계만방에 알려야 합니다”라며 우렁찬 목소리로 독립만세를 선창했다.

마을 주민들도 태극기를 움켜쥐고 감격에 겨워 힘차게 독립만세를 외쳤다. “대한 독립 만세!”

만세 소리에 화들짝 놀란 일본 군경이 현장에 달려와 이상백(당시 34세)과 이내성, 이영래 등 8명을 체포하고, 군중들을 강제로 해산했다.

하지만 일제의 총칼에도 주민들의 국권회복 의지는 꺾이지 않았고, 오히려 불타올랐다.

이영식과 같은 대구계성학교 학생인 김도길이 진평동 청년유지인 김봉술과 김성윤을 설득해 3월14일 2차 만세운동을 벌였다.

2차 만세운동에도 200여 명의 마을 주민들이 모여 항일 저항의 위력을 과시했다.

1, 2차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진평동 애국지사는 이상백과 이내성, 이영래, 임점석, 임용섭, 박명언, 권영해, 이윤약, 장상건, 김봉술, 김성윤, 장준현 등 20여 명이다.

하지만 독립을 열망하는 구미지역의 만세운동은 일본 군경의 탄압에도 꺼지지 않고 오히려 들불처럼 번져갔다.

같은 해 4월3일 해평면, 4월8일 임은동, 4월12일 선산장터에서 잇따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진평동(인동) 만세운동이 구미지역 독립운동에 촉매제가 된 것이다.

1927년 10월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한 장진홍, 이내성, 장용희 등과 친일세력을 비밀리에 암살하는 특공대원인 박희광, 1941년 대구 사범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다혁당 당수 겸 예술부장 권쾌복 등의 의열지사가 모두 구미 사람들이다.

한편, ‘인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인사모)’은 1919년 진평동 만세운동을 기념하고 계승하기 위해, 매년 당시 만세운동의 현장이었던 구미시 진평동(인동) 마을 뒷산에서 재연행사를 갖고 있다.

1919년 3월12일 구미시 진평동(인동) 마을 뒷산에서 주민 300여 명이 애국지사 이상백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이어 3월14일 제2차 진평동 독립만세운동이 일제 군경의 눈을 피해 같은 곳에서 주민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인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사모)은 매년 독립만세운동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재연행사를 열고 있다.(행사 사진은 지난해 재연행사 사진)
이창희 인사모 회장은 “올해는 진평동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인만큼 큰 의미를 두고 재연행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독립만세운동의 의미를 모르는 학생들과 참여자들이 많아 아쉽고 안타깝다”며 “그날의 정신이 잊히지 않도록 교육과 연계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1919년 3월12일 구미시 진평동(인동) 마을 뒷산에서 주민 300여 명이 애국지사 이상백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이어 3월14일 제2차 진평동 독립만세운동이 일제 군경의 눈을 피해 같은 곳에서 주민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인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사모)은 매년 독립만세운동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재연행사를 열고 있다.(행사 사진은 지난해 재연행사 사진)


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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