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3월8일 오후 2시 큰장 소금집앞에서 일제 봉기||동산병원 사택 앞 숲, 큰장 가

▲ 대구 중구 동산동 청라언덕 인근 3·1운동길에는 그날의 하성이 느껴지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 대구 중구 동산동 청라언덕 인근 3·1운동길에는 그날의 하성이 느껴지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기미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대구 출신의 이갑성은 1919년 2월24일 대구를 찾았다.

그는 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 이만집 목사와 남산교회 김태련 조사, 계성학교 백남채·김영서 교사, 신명여학교 이재인 교사 등을 만나 서울에서 계획 중인 3·1만세운동 소식을 조심스럽게 전하며 대구에서도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켜달라고 권유했다.

기독교 지도자 이만집 목사와 김태련 남산교회 조사 등 의기투합한 이들은 큰장(서문시장) 장날인 3월8일 오후 봉기를 하기로 뜻을 정하고 시위에 참여할 학생과 시민 모집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일제에 정보가 새어 나가 3월4일과 7일에 홍주일, 백남채 등이 체포됐다. 또 일제 경찰은 특별경계령을 내렸다. 하지만 독립만세 운동 준비는 계속 진행됐다.

대구 독립운동 유족 100곳 답사 여행을 펴낸 정만진 전 대구시 교육위원은 “1919년 3월8일 오후 1시 큰장 소금집 앞에서 모였다.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 서울 탑골공원보다 일주일 늦게 시작된 대구의 독립 만세운동은 그렇게 시작됐다”고 전했다.

남학생들은 장에 가는 것처럼 지게를 지고, 여학생들은 빨래하러 가듯 태극기를 숨긴 대야를 인 채 움직였다.

3월8일에는 계성학교 아담스관 지하에서 독립선언문을 등사했다.

현재 동산병원과 제일교회를 가로질러 90계단까지 이어지는 3·1운동길은 당시의 함성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 길은 대구 3·1만세운동 행진로는 아니다. 학생들이 경찰의 눈을 피해 이곳에 지나간 비밀통로였다.

지금은 반듯하게 길이 뚫려있고 길옆으로 3·1운동 함성을 느낄 수 있는 전시물들이 마련돼 있지만 당시는 우거진 숲과 오솔길이었다.

인근 선교사 사택도 좋은 은신처였다. 동산병원을 세운 선교사들도 성경을 기초해 대한독립을 지원하던 터였다. 거사에 참여할 학생들을 사택 곳곳에 숨겨주기도 했다.

큰장은 오후 무렵이 되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후 2시 대구고보 학생 200여 명이 교복을 입은 체 일제 경찰의 저지를 뚫고 뛰어왔다.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시장 안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김태련 조사가 미리 준비해 둔 달구지 위로 올라섰다. 그는 독립선언서를 들고 낭독을 하자 일제 경찰이 제지했다.

이만집 목사가 달구지에 뛰어올라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자 1천여 군중들은 일제히 품고 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연호했다.

독립의 열망에 불타오르는 군중은 큰장 소금가게 앞을 출발해 동산교를 지나 대구경찰서(현 중부경찰서)와 경북도청(경상감영공원)으로 달렸다.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약전골목(약령시)과 종로, 대구읍성 남장대 터(중앙파출소)를 지나 달성군청(대구백화점)까지 향했다.

일제는 달성군청 앞에서 총칼과 곤봉으로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평화적인 시위였지만 일제의 대응은 강경했다.

기세를 이어가 3월10일 오후 4시에는 대구 남문밖 덕산정시장(남산교회 인근)에서 교회 신도 200여 명과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두 차례 만세운동에서 일제는 모두 225명을 검거했다. 계성학교 학생 37명과 대구고보 학생 7명 등 모두 76명이 실형을 받았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만집은 징역 3년, 김태련은 징역 2년6월에 처해졌다.

전재규 전 대신대 총장은 “동산병원 언덕 솔밭은 대구 3·1운동 거사의 중요한 비밀통로였다. 그 길을 밟았던 용맹스러운 애국 학생들의 힘찬 발 디딤은 지금도 땅속에서 진동이 돼 메아리치고 있는 듯하다”고 회상했다.



이주형 기자 leejh@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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