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씨(無名氏) / 김형영

발행일 2019-03-05 18:26:23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무명씨(無名氏)/ 김형영

별이 하나 떨어졌다/ 눈에 없던 별이다// 캄캄한 하늘에 비질을 하듯/ 한 여운이 잠시/ 하늘에 머물다 사라진다/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보다 작게/ 보다 작게/ 한 푼 남김없이 살다간 사람// 그를 기억하소서/ 그의 여운이 아직 사라지기 전에/ 한때 우리들의 이웃이었던 그를

시집 『나무 안에서』 (문학과지성사, 2009)

이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어야만 한다. 이름이 없으면 기억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면 역사에도 없다. 호명은 역사가 기억하는 방식이다. 기록하지 않는 생은 우리들 기억에서도 쉬 사라진다. 그러나 ‘눈에 없던’ 별이 하나 떨어지듯 이 땅의 수많은 각각의 이웃들은 그렇게 살다 갔다.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보다 작게, 보다 작게’ ‘한 푼 남김없이 살다간 사람’ 가운데는 내 할아버지도 있다. 힘없는 나라에서 태어나 변변한 이름을 갖진 못했으나 격랑의 세월 속에서 반듯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기를 꿈꾸다가 민초란 이름에 합동으로 파묻혀 스러졌다.

쥐뿔도 없는 우리들 삶이란 대저 그러하다. 캄캄한 밤하늘에 잠시 머물다가 떠나면 그만이다. 그러나 다른 이는 몰라도 나로서는 기억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있다. 1891년 신묘(辛卯) 생 1946년 병술(丙戌) 졸, 55년을 이 땅에서 살다간 내 조부 권병홍(權秉鴻)도 그렇다. 역사는 기록하지 않으나 나로서는 함부로 지울 수 없는 ‘무명씨’ 아무개인데 나조차도 그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다. 총을 들고 무장투쟁에 나섰거나 옥고를 치렀거나 순국하진 않았으나 만세를 불렀고 일본 순사와 불화하였으며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밟히기도 했다. 조부는 성주에서 태어나 선남의 도산서당에서 글을 깨우치고 유학에 적을 둔다.

그리고 고향에서 10대 청소년기를 보낸다. 그러니까 ‘미스터 션샤인’의 시대 배경인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는 지점이다. 3·1운동 한 달 뒤 ‘성주 4·2만세 운동’에 참가했던 일기가 있다. 내막을 잘 알진 못해도 유림의 주도로 펼쳐진 ‘파리장서운동’과도 무관치 않다. 파리장서운동은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할 기회를 놓친 유교계가 뒤늦게 각성하여 일으킨 독립운동으로 전국의 137명 유림대표가 조선 주권의 찬탈 과정을 낱낱이 폭로하는 등 장문의 조선독립 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사건이다. 파리장서에 서명한 유림 가운데는 성주 사람이 16명이나 된다. 조부는 문중 대표들이 주축인 여기에 끼지 못했지만 실무를 도왔다고 한다.

장유유서를 받드는 유림에서 28세의 ‘청년’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대부분 40대 이상이고 심산 선생만 해도 당시 41세였다. 심지어 심산 선생조차 137인에는 들지 않았다. 파리장서 사건에 대한 최초의 검거는 성주군민 3천여 명이 모여 4월 2일 성주 장날에 일으켰던 만세운동의 현장에서였다. 할아버지는 이때 작은할아버지(당시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린 바둑 고수 권병욱)의 도움으로 몸을 피했고, 이후 아예 함경북도 청진으로 가족들이 이주를 한다. 일본의 마수가 비교적 덜 미치는 곳을 찾아 생계를 꾸리며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후 행적 역시 세세하게 알진 못하나 독립운동의 피난처인 연해주로 가는 길목에서 여러 명망가와의 교류가 있었으며 툭하면 한두 달씩 집을 비우곤 했다고 들었다. 할아버지로부터 뼈아픈 근대사의 고해성사를 들을 기회를 이승에서 갖진 못하여 ‘여운’은 길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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