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의성김씨 학봉 종택



임진왜란 때 부인에게 보낸 학봉의 언문편지...



대구에서 안동으로 가는 고속도로 서안동 인터체인지에서 나와서 봉정사 방향으로 조금 달리면 학봉 김성일(1538~1593) 선생의 종택이 있는 금계마을이 나온다.

금계(金溪)는 옛날에 금제(琴堤)라 하였는데 금(琴)이 방언으로 검다는 의미의 검(黔)이기 때문에 속칭 검제(黔堤)라고도 불린다. 풍수가들은 이 마을을 두고 천년불패지지(千年不敗之地)라고 말한다. 천 년 동안 패하지 않고 번성하는 땅이라는 의미이다.

아울러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라고도 한다. 곧 전쟁, 기근, 전염병이 없는 복된 땅이라고 알려진 영남의 길지로 인구에 회자된다.



학봉 종택에는 학봉선생의 삶과 학문, 충절정신이 서려있고, 의병활동에 헌신한 후손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학봉의 후예들은 평상시에는 예를 중시하는 선비의 삶을 살지만,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독립운동에 앞장서서 싸워왔던 애국시민들이었다. 고택에는 그들의 충절정신이 녹아있는 문화재가 가득하다.



◆퇴계학의 적통을 이은 학봉의 학문

학봉은 의성김씨 내앞파 시조 김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진은 1525년 사마시에 급제한 뒤 성균관에 유학했다. 그러나 과거공부를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는 다섯 아들을 모두 퇴계의 문하에 보냈는데, 그중 세 아들은 대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어린시절 학봉은 유난히 총명했다. 형제들과 퇴계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는데 그 총명함에 대해 스승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29세(1566) 때 퇴계가 나라의 부름을 받아 서울로 가면서 요임금과 순임금으로부터 주자에 이르기까지 유학의 도통을 이은 성현들의 학문과 심법을 4자 운문으로 적은 80자 명문을 짓고 직접 써서 학봉에게 주었으니, 이것이 바로 병명(屛銘)이다.



병명의 마지막 구절에 “박문에다 약례까지 양쪽 다 지극하여[博約兩至]/연원 정통 이어받은 그 분은 주자(朱子)였네[淵源正脈]”라는 글귀가 있다. 이 글귀 속에 학문과 인격의 완성을 이루기를 기대하는 제자에게 주는 스승의 마음이 담겨있다. 후손들은 이 병명을 퇴계의 학문을 적통으로 이었다는 증표로 여기고 있다.



학봉은 31세 때 문과에 급제해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다음 해 퇴계가 선조임금의 간청을 물리치고 벼슬에서 물러나면서 동고 이준경, 고봉 기대승, 그리고 제자인 학봉을 추천할 정도로 제자로 인정하였다. 학봉 또한 퇴계가 세상을 하직하자, 스승의 평생 행적을 정리한 ‘퇴계선생사전’을 지었다.



47세에 나주목사로 부임해 신문고를 설치해 억울한 백성들을 보살폈다. 이듬해 퇴계의 여러 저술을 모아서 간행했고, 53세 때 일본 통신부사로 주체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일본인들에게 퇴계학을 전하였다.

54세에 세 번의 상소를 올려 군정과 시정과 국방강화를 주장하였고, 55세에 경상도병마절도사, 초유사, 감사로 관군과 의병을 지휘하여 진주대첩을 이루어내었다. 56세 때 왜군의 공격에 대비해 병사와 백성을 돌보던 중 순국하면서 25년의 벼슬살이를 마감했다.



◆ 충절의 구국정신 잇는 후손

학봉이 54세(1591) 때 일본 통신부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복명한 일로 곤경에 처했는데 이에 대해 편향된 시각이 있다.

<동아원색대백과사전>을 보면, 학봉에 대해서 ‘당파싸움에 급급한 나머지 침략의 우려가 없다고 보고했다’라고 하면서 국론을 분열시킨 인물로 폄하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 황윤길의 주장과는 달리, 학봉은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임진왜란의 생생한 기록인 <징비록>에는 학봉에 대해 ‘사려 깊은 대학자의 고뇌’에서 내린 복명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당시 민심이 피폐하여 왜군이 침범한다는 소문이 만연하자, 왜군이 문제가 아니라 민심부터 안정시켜야 한다는 충정으로 왕에게 고했던 것이다.



이는 평소 학봉의 행적을 통해 그의 인품과 소신을 알 수 있다. 학봉이 36세(1573)에 사간원정언으로 있을 때, 선조가 “나를 옛날 어느 임금과 비교할 수 있는가”라고 묻자 정이주가 “요순 같은 성군입니다”라고 말하자, 학봉은 “전하는 요순 같은 성군도 될 수 있고, 걸주(폭군의 상징인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같은 폭군도 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선조가 그 까닭을 묻자 “신하가 옳게 간하는 말을 듣지 않는 잘못된 버릇이 있으시니 진실로 염려됩니다”라고 목숨을 걸고 간하자, 선조가 화를 내며 얼굴빛이 변하니 주위에서 목숨을 잃을 것을 걱정했다. 그는 이처럼 충심을 다해 임금을 보필했다.



또한 42세 때 사헌부장령이 되자 임금이 싫어하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불의와 부정이 있는 조정의 관리들을 탄핵하여 바로잡는 데 앞장서기도 하고, 억울한 사람을 구명하는데도 눈치를 보지 않았다. 그렇기에 당시 조정에서는 그를 ‘대궐 안 호랑이[殿上虎]’로 불렀다.



55세 때 학봉은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가는 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당시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도망하여 기강이 엉망이었다.

선조는 다시 학봉을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하였다. 초유사는 난리가 났을 때 백성들을 설득하여 나라를 위해 일어서도록 권유하는 직책이다. 그는 관군과 의병을 모아 대항하였다. 왜적은 3만의 병력으로 진주성을 공격해 왔지만, 학봉은 목사 김시민과 함께 관군과 의병을 지휘해 진주대첩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런 학봉의 기개와 충절정신이 후손들에게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11대 종손인 김흥락은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한 안동지역 독립운동의 대부였다. 정부에서 훈장을 받은 제자만 60명이나 배출했고, 학봉의 직계 후손 중에서도 11명이 훈장을 받은 사실이 그 증거이다.



13대 종손인 김용환은 안동 일대에서 유명한 노름꾼이자 파락호로 위장하여 학봉종택에 대대로 내려오던 전답 700두락 18만 평(현재 시가로 200억 원)을 모두 독립군자금으로 보냈다. 근래에 독립운동을 했던 자료와 증거들이 발견되어 1995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현재 15대 종손인 김종길(85) 씨는 부친이 돌아가신 뒤 3년상을 마치고 2010년 1천400명이 모인 가운데 길사를 지낸 뒤 학봉의 종손이 됐다. 그는 삼보컴퓨터 사장 등을 지냈지만,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실천해 조상을 현창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종부 이점숙씨는 종가음식문화보존회를 통해 종가의 음식문화를 알리는 등 함께 가문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문화재의 보고 운장각

학봉종택은 사랑채, 안채, 문간채, 사당, 풍뢰헌(風雷軒), 선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운장각(雲章閣) 등 대소 건물이 90여 칸이 넘는다.

운장각에는 학봉이 남긴 서적, 유품, 친필기록, 고문서 56종 261점(보물 제905호), 제초고 및 선조 전래의 전적문서와 후손들의 유품 등 503점의 유적이 소장된 문화재의 보고이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유물은 학봉이 사용하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안경이다. 그가 명나라에 서장관으로 갔을 때 구입한 것이라고 하는데, 안경테는 거북껍질로 되어 있다. 선생의 손때가 묻어 있다고 생각되니 숙연해진다.



고문서는 학봉종택의 자랑으로 교지(敎旨)·교서(敎書)·유서(諭書)·소지(所志)·분재기(分財記) 등 1만여 점이다.

그중에 간찰(簡札)·제문(祭文) 등은 제외하고, 특히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연구에 필요한 문서류만 선별하여 17종 242점이 1987년 3월7일 보물 제906호로 지정되었다. 이들 자료는 조선시대 중기, 후기, 말기의 사회·경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필자는 학봉이 55세(1592) 겨울. 임진왜란 중에 부인에게 직접 쓴 언문편지에 눈길을 멈추었다. 때는 12월24일. 왜적과 목숨을 건 싸움을 했던 10월의 전투 끝에 진주성을 지켜낸 지 두 달이 됐다.

전쟁에 지친 백성들을 돌보고 다시 쳐들어오는 왜적과의 전투를 위해 노심초사 준비를 하던 중에 학봉은 어느 날 안동 납실에서 피난 생활을 하는 부인 권씨에게 언문편지를 써서 보낸다.



“요사이 추위에 모두 어찌 계신지 가장 염려하네. 나는 산음 고을에 와서 몸은 무사히 있으나 봄이 이르면 도적이 대항할 것이니 어찌할 줄 모르겠네. 장모 뫼시옵고 설 잘 쇠시오. 자식들에게 편지 쓰지 못하였네. 잘들 있으라 하오. 감사라 하여도 음식을 가까스로 먹고 다니니 아무것도 보내지 못하오. 살아서 서로 다시 보면 그때나 나을까 모르지만…. 그리워 하지 말고 편안히 계시오.”



학봉은 공적으로는 경상우도감사로서 진주성을 수성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사적으로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미안함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편지를 보낸다.

무엇보다 아내를 배려한 한글로 된 자유분방한 글씨와 수결은 오백년 전 한글서예의 귀한 자료로 자리매김 된다. 아울러 종택에 걸린 명가의 현판 글씨도 건물에 잘 어울린다. 특히 미수 허목의 ‘광풍제월’이 오랫동안 머리에 맴돈다.

정태수(서예가·대구경북서예가협회 이사장)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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