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보각국사 일연



“즐겁던 한 시절 자취 없이 가버리고/ 시름에 묻힌 몸이 덧없이 늙었에라/ 한 끼 밥 짓는 동안 더 기다려 무엇 하리/ 인간사 꿈결인 줄 내 인제 알았노라.”



군위군청 뜨락에 세워진 일연 시비에 새겨진 글이다.

▲ 일연선사가 22세부터 22년간 머물면서 수도했던 곳으로 전해지는 달성군 비슬산에는 일연선사의 흔적을 찾으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일연선사가 머물렀던 곳으로 전해지는 보당암의 터로 전해지는 대견사의 전경.
▲ 일연선사가 22세부터 22년간 머물면서 수도했던 곳으로 전해지는 달성군 비슬산에는 일연선사의 흔적을 찾으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일연선사가 머물렀던 곳으로 전해지는 보당암의 터로 전해지는 대견사의 전경.


삼국유사가 일연 스님의 작품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삼국유사’가 허황한 잡학 서적이라는 비난을 받은 시기가 있었던 것처럼, 일연 스님 또한 인각사의 비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시기가 있었다.

▲ 경산 삼성현역사문화관에 세워진 일연선사의 모습.
▲ 경산 삼성현역사문화관에 세워진 일연선사의 모습.


지금은 일반적으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함께 고대사를 서술한 역사서의 양대산맥’으로 평가되고 있다.



주보돈 박사는 삼국유사에 대해 “삼국유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삼국사기를 함께 다루어야 하는 빛과 그림자 같은 성격을 가진 신라사의 기본사서”라며 “서로를 대비해야 비로소 그 성격들이 제대로 드러난다”고 평가했다.



일연 스님은 13세기 말 고려시대 국사로 책봉돼 나라의 길을 제시하는 가장 큰 스님이었다.



몽고의 침입으로 나라가 어지러울 때 팔만대장경을 제작하는 일에 직접 참여했으며, 삼국유사와 중편조동오위와 같은 100여 편의 저술을 펴냈다. 아쉽게도 지금까지 남은 저술은 삼국유사, 중편조동오위가 유일하다.



▲ 군위 인각사에 남은 일연선사비의 모습. 임진왜란 당시 크게 훼손돼 남은 글자가 거의 없어 안타깝다.
▲ 군위 인각사에 남은 일연선사비의 모습. 임진왜란 당시 크게 훼손돼 남은 글자가 거의 없어 안타깝다.


일연스님의 행적은 ‘인각사 보각국사비’의 비문 전체가 실려 있는 탁본이 발견되면서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보각국사비는 일연 스님을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탑과 함께 군위 인각사에 있다.



일연의 비문은 전면의 본문은 민지(閔漬)가 짓고, 후면의 음기는 산립(山立)이 지었다. 서성이라 불리는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하여 세웠다.



◆일연의 행적

일연은 고려 희종 2년 1206년 경주의 속현이었던 장산군, 현재의 경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속성은 김씨, 이름은 견명이다. 경산시는 삼성현역사문화관을 설립해 일연선사의 흔적을 더듬어볼 수 있게 하고 있다.

▲ 일연선사가 태어난 곳은 경산이다. 경산시가 일연선사를 비롯해 3분의 성현을 만나볼 수 있게 조성한 삼성현역사문화관 정문 모습.
▲ 일연선사가 태어난 곳은 경산이다. 경산시가 일연선사를 비롯해 3분의 성현을 만나볼 수 있게 조성한 삼성현역사문화관 정문 모습.


일연은 9세에 지금의 광주로 알려진 해양 무량사에서 불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떤 학자들은 해양이 지금의 영해와 포항지역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광주에도 일연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14세에 설악산 진전사에서 머리를 깎고, 대웅장로에게 구족계를 받아 본격적인 승려의 길을 걸었다. 이어 강석과 선림을 편력하면서 수행해 동료들로부터 구산사선의 으뜸으로 평가받았다.



▲ 일연선사가 36여년간 머물렀던 달성 비슬산. 유가사에 세워진 일연선사의 시비.
▲ 일연선사가 36여년간 머물렀던 달성 비슬산. 유가사에 세워진 일연선사의 시비.


일연은 22세에 승과 선불장에서 상상과에 합격하고, 현재 달성 비슬산인 포산 보당암에 주석하며 수행했다.



그는 22년간 포산의 여러 사찰에 머물면서 특정 신앙이나 종파에 매이지 않고 신앙과 사상 공부에 매진했다. 비슬산에 그의 흔적을 쫓아 대견사, 유가사 등의 사찰과 함께 일연 시비와 동상이 세워져 있다.

▲ 일연선사가 14세에 머리를 깎고 본격적인 불법을 공부하기 시작한 설악산 진전사의 삼층석탑.
▲ 일연선사가 14세에 머리를 깎고 본격적인 불법을 공부하기 시작한 설악산 진전사의 삼층석탑.


44세에 정안이 설립한 남해 정림사에 초청되어 주법이 되었다.



고종 46년, 54세에 일연은 대선사가 되었다. 2년 뒤 56세에 왕명을 받아 강화 선월사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 달성군 비슬산 자락에 세워진 일연선사 동상.
▲ 달성군 비슬산 자락에 세워진 일연선사 동상.


원종 5년 1264년에는 영일 운제산 오어사 주법으로 있다가, 다시 포산 인홍사(仁弘寺)로 옮겼다. 1274년 인홍사를 중수해 사액을 받아 인흥사(仁興寺)로 개명했다.

또 포산 동쪽에 있는 용천사를 중수해 불일사로 절 이름을 바꾸고 수행을 이어갔다.



▲ 일연선사가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집필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청도 운문사.
▲ 일연선사가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집필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청도 운문사.


충렬왕 3년, 72세에 왕명을 받아 운문사에 주석하면서 선풍을 높였다. 특히 운문사에서 삼국유사를 썼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만, 운문사에는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충렬왕 8년에는 개경의 광명사에서 주석하기도 했다. 그다음 해 일연은 원경충조(圓徑冲照)라는 호를 받으면서 국존으로 책봉됐다. 국사가 아닌 국존으로 책봉한 것은 원나라가 쓰는 국사 칭호를 쓰지 못하도록 간섭했기 때문이다.

▲ 군위 인각사에 남은 일연선사부도비.
▲ 군위 인각사에 남은 일연선사부도비.


일연은 1283년 78세에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군위 인각사로 내려왔다. 일연은 인각사에서도 2회에 걸쳐 구산문도회를 개최했다. 이는 가지산문을 중심으로 불교계의 교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미가 깊은 것으로 해석된다.

▲ 군위 인각사 국사전에 안치된 일연선사의 진영.
▲ 군위 인각사 국사전에 안치된 일연선사의 진영.


일연은 충렬왕 15년, 1289년 7월 84세의 일기로 인각사에서 입적했다. 인각사에 머무른 지 6년 만의 일이다.



▲ 보각국사 일연선사의 진영을 안치하고 있는 인각사의 국사전.
▲ 보각국사 일연선사의 진영을 안치하고 있는 인각사의 국사전.


삼국유사는 일연의 사후 보각국사로 추증되면서 청분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청분은 삼국유사에 무극으로 등장하는 일연의 제자로 전해지고 있다. 무극은 일연의 사후에 행장을 지어 충렬왕에게 바치는 등 일연을 추종하면서 일연이 입적한 해에 운문사 주지직을 맡은 인물이다.



◆보각국사비

일연이 입적하고 6년이 지난 1295년, 그가 입적한 인각사에 ‘보각국사비’가 건립됐다. 일연의 제자 혼구, 무극, 청분으로 불리는 스님의 행장으로 민지가 짓고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해 비명을 새겼다.



비의 뒷면에 진정대선사 청분(무극)이 세운 경위를 적고, 문도와 단월들의 이름을 열거한 음기를 새겼다.



비문에는 일연의 저술로 ‘어록’ 2권, ‘게송잡저’ 3권, ‘중편조동어위’ 2권, ‘조파도’ 2권, ‘제승법수’ 7권, ‘대장수지록’ 3권, ‘선문염송사원’ 30권, ‘중편조정사원’ 30권 등 100여 권이 기록되어 있다.

▲ 일연선사비의 탁본이 발견되면서 전체 글자를 알게 됐다. 비가 발견되었던 곳에 복원해 세운 인각사의 일연선사비.
▲ 일연선사비의 탁본이 발견되면서 전체 글자를 알게 됐다. 비가 발견되었던 곳에 복원해 세운 인각사의 일연선사비.


이 가운데 ‘중편조동오위’가 일본에서 발견돼 삼국유사와 함께 유일하게 현존하는 일연의 저술로 남아있다.



비문의 말미에 “스님은 사람됨이 성품을 꾸미지 않았으며 진정으로 사물을 대하였다. 무리 가운데 있으면서도 홀로 있는 듯하였고, 존귀함과 비천함을 같이 생각하였다. 불도를 닦는 여가에 대장경을 열람하고 여러 전문가의 주석을 깊이 연구하였다. 겉으로 유가의 책을 섭렵하고 겸하여 백가를 꿰뚫었으니, 처방에 따라 사물을 이롭게 하고 신묘한 쓰임이 종횡무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보각국사비는 보물 제428호로 지정돼 현재 군위 인각사에 보존되고 있지만, 많이 훼손된 상태여서 일부 비문을 겨우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왕희지 글씨가 희귀하여 너도나도 탁본하면서 훼손이 크게 진행되었다.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파손을 자행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다행히 탁본이 발견되면서 비문의 전문을 새긴 ‘보각국사비’를 복원해 처음 발견되었던 곳에 세워 후인들이 기념할 수 있게 했다.



◆비슬산과 설악산 진전사

일연선사 수행의 길은 비슬산과 진전사에서 찾아야 한다. 9세에 무량사에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본격적인 수행은 14세에 머리를 깎고 설악산 진전사에서 대웅장로로부터 구족계를 받아 본격적인 승려의 길을 걸었으며, 비슬산에서 22년간이나 수도 정진했기 때문이다.



설악산 진전사는 통일신라 헌덕왕 821년 도의국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신라말에서 고려 초에 선종의 종찰이자 당대의 선승 염거화상, 보조국사 등이 득도한 곳이다. 일연선사가 체발득도한 선종의 대본찰로 기록되고 있다.



1467년까지 존속되었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일제강점기에 둔전사로 불리어 오다 발굴조사에서 진전사라는 기와편이 발굴되면서 현재 터가 재확인되었다. 국보 제122호인 진전사지 삼층석탑과 보물 제439호 도의국사의 부도탑이 남아있다.

▲ 일연선사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비슬산. 그 계곡에 마치 예술작품 같은 얼음이 얼어 장관이다.
▲ 일연선사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비슬산. 그 계곡에 마치 예술작품 같은 얼음이 얼어 장관이다.


일연은 22세에 승과에 합격한 이후 비슬산에서 22년간 머물며 보당암, 무주암 등에서 깨우침을 얻고, 4개소의 암자와 절에서 수행을 이어갔다.



지금 비슬산에는 대견사가 있다. ‘크게 보고’, ‘크게 느끼고’, ‘크게 깨우친다’는 뜻이다. 신라 헌덕왕 때 810년 보당암으로 창건했는데, 조선 세종 때 대견사로 개칭되었다. 일연선사가 22세에 주지로 주석했던 곳이라 전한다.



대견사는 일제강점기 1917년 일본의 기를 꺾는다는 속설에 따라 강제 폐사되었다. 100여년 동안 폐사지로 방치되어 오다가, 2012년 동화사와 달성군 협약으로 정식사찰로 재등록해 호국사찰로 복원되었다.



◆운문사

운문사는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운문산 기슭에 있다. 청도군에서 동으로 약 40㎞ 지점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말사이다. 청도군에 속해 있으나 교통 편의상 대구와 생활권이 밀접해 있고, 경주와 울산 등지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 일연선사가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집필했다는 청도 운문사 입구의 소나무 숲길.
▲ 일연선사가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집필했다는 청도 운문사 입구의 소나무 숲길.


신라 진흥왕 21년인 560년에 한 신승에 의해 창건돼 원광국사, 보양국사, 원응국사 등에 의한 제8차 중창과 비구니 대학장인 명성스님의 제9차 중창불사에 의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경내에는 천연기념물 180호인 처진 소나무와 금당 앞 석등을 비롯한 보물 7점을 소장하고 있는 유서깊은 고찰이다. 사찰 주위에는 사리암, 내원암, 북대암, 청신암 등 4개의 암자와 울창한 소나무, 전나무 숲이 있어 이곳의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특히 운문사는 신라 삼국통일의 원동력인 ‘세속오계’를 전한 원광국사와 일연 선사가 오랫동안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지었다는 내력으로 더욱 유명하다. 지금은 260여 명의 학승이 4년간 경학을 공부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비구니 교육기관이 자리한 사찰이다.



높이 1천188m 고지로 태백산맥의 가장 남쪽에 있는 운문산은 동으로 가지산, 남으로 재약산, 영축산 등과 이어져 있어, 산악인 사이에 ‘영남의 알프스’라 불리고 있다.



운문산은 산세가 웅장하며 나무들이 울창하여 등산객이 많이 찾는다. 이곳에는 운문사를 비롯한 크고 작은 절과 암자가 있고, 주변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일연선사가 운문사에 주석하면서 삼국유사를 집필했다는 연구보고서들이 나오고 있지만, 운문사에는 이렇다 할 일연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인각사

인각사는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절터로 전해지면서 사적 제37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인각사의 옛터는 남북이 좁고 동서는 넓은 평지를 이루는 곳에 있었는데, 현재의 사찰 경내는 좁고 좌·우측에 있는 넓은 평지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인각사는 신라시대 선덕여왕 12년인 643년에 원효(元曉)가 창건했다. 절의 입구에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있는데, ‘기린이 뿔을 이 바위에 얹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인각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1307년(충렬왕 33년)에 일연이 중창하고,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했다고 일부 학자들과 군위군은 주장하고 있다.



당시 이 절은 크고 높은 본당을 중심으로 그 앞에 탑, 좌측에는 회랑, 우측에는 이선당(以善堂), 본당 뒤에 무무당(無無堂)이 있었다고 한다.



일연은 이곳에서 총림법회 등 대규모의 불교행사를 개최했다. 조선 중기까지 총림법회를 자주 열고, 승속(僧俗)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나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로 등록되어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과 2동의 요사채뿐이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428호로 지정된 인각사보각국사탑과 비가 있다. 일연선사비는 임진왜란의 병화 등으로 글자의 훼손이 심해 알아보기 어렵다. 법당 앞에는 신라시대 삼층석탑이 있다. 탁본이 발견되면서 비문의 전문을 알게 돼 절의 동남쪽에 일연선사비를 복원해 세워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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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일연의 생애(표 작성)

-1206년(고려 희종 2년) 경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지방토호 김언필, 어머니 이씨

-1214년 9세에 광주(또는 영일, 영해지역) 무량사에 들어가 학업 시작,

-1219년 14세 설악산 진전사의 대웅장로부터 구족계 받음.

-1227년 22세에 승과에 합격, 현풍 비슬산 보당암

-1237년 32세 포산(비슬산) 무주암에서 ‘생계불감 불계불증’을 화두로 깨달음을 얻었다.

-1249년 44세 남해 정림사 주법

나라에서 삼중대사, 선사(41),

-1256년 54세 대선사가 됨

-1261년 56세 강화 선월사 주지로 부임

-1264년 59세 운제산 오어사, 포산 인흥사, 불일사(용천사), 인흥사에 주석

-1277년 72세 운문사 주지 취임, 1277년 삼국유사 저술 시작 1281년 1차 완성.

-1283년 78세 인각사 선도 정진하며 후학의 교육

-1289년 84세 입적(인각사)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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