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층의 역사인식

발행일 2019-03-28 15:52:06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얼마 전 전두환씨가 23년 만에 법정에 섰다. 그것도 광주에서다. 혐의는 사자명예훼손으로, 지난 2017년 낸 회고록에서 5·18 당시 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로 모욕한 것이 그를 재판정에 오르게 한 것이다.

지난 3월12일 낮 광주지방법원 입구에 그가 도착했다.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법정 안으로 들어가려는 그에게 기자들이 질문을 던졌다. “혐의 인정하느냐.” “발포 명령 부인하느냐.” 혐의 질문에는 대꾸가 없던 그였지만, 발포 명령 여부를 묻는 말에는 “이거 왜 이래!”라고 짜증 섞인 고함을 내질렀다.

이를 두고 전 씨의 반성 없음을 질타하는 소리가 나왔고, 더불어 그동안 그가 국민에게 던진 말들도 다시 회자되었다. “예금통장에 29만 원밖에 없다.”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다.” “미국식과 같은 민주주의를 했다.” 그의 말들은 발언 당시 정국 상황에 따라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기간도 다소 차이를 보였다. 그 말의 무게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정략적인 이용 가치에 따라서 그랬던 것 같다.

공교롭게도 전두환씨가 광주 법정에 출두하던 그 날, 국회에서는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국회 연설을 했다. “더 이상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은의 수석대변인이라는 낯 뜨거운 이야기를 듣지 않게 해주십시오.” “지난 70여 년의 위대한 대한민국의 역사가 좌파정권 3년 만에 무너져 내리고 있다.” 또 그는 지난 14일 최고위원회의에서는 “해방 후 반민특위로 국론이 분열됐던 것을 모두 기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논란이 커지자 얼마 후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의 뜻을 밝히면서도 “내가 비판한 것은 반민특위가 아니라 2019년 반문특위”라며 말 바꾸기를 하기도 했다.

전두환씨와 나경원 원내대표의 발언이 연속선상에서 생각난 것은 아마 같은 날 벌어졌다(나 원내대표의 반민특위 발언은 며칠 후에 있었다)는 동시간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두 사람의 발언에 함의된 ‘역사’라는 말이 연상 작용을 일으켰던 것 같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객관적 사실로서의 역사와 주관적으로 재구성한 역사의 상호 작용을 강조한 의미라고 본다는데, 전 씨와 나 원내대표는 객관적인 사실로서의 역사와 주관적 의미로서의 역사 중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고 그 발언을 한 것일까. 지도층의 역사 인식이 대중들에게 적지 않게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우려스러울 따름이다.

다시 한번 전두환씨의 회고록을 살펴보자.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다. “5·18특별법에 의한 검찰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광주사태와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게 밝혀졌다. 역사의 기록은 승자의 기록일 뿐이어서 패자의 얘기는 모두 묻히게 된다. 나의 회고록이 세월의 힘을 빌려 진실을 밝힌다 해도 신화처럼 굳어진 편견과 오해가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또 “광주사태는 북한 특수부대에 의한 도시게릴라 작전이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자신을 역사의 패배자로 보면서 편견과 오해가 진실을 가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기록된 역사는 역사가가 주관적으로 다시 구성해 진실이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수많은 피해자가 생존해 있는 사실을 조작하거나 왜곡한 것이라고 부정하는 데까지야.

오랜만에 국회 문을 연 정치권은 어김없이 난타전을 계속하고 있다. ‘극우정치’ ‘좌파독재’라고 비난하며 서로가 상대방을 진영의 극단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각종 여론조사에서 대통령과 민주당의 지지율이 하락세를 보이는 데 반해 제1야당 자유한국당은 지지율 30%대를 회복하며 기세를 올리는 국면이다.

요즘 지역에서는 내년 총선 시계가 무척 빠르게 간다는 느낌이다. 의원들의 지역 챙기기 행보가 분주하고 일부 지역구에는 출마 하마평도 오르내리고 있다. 선거에서 국민들의 결정이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고, 오히려 감정적이고 선동적인 진영 논리에 휘둘리기 쉽다는 게 경험칙상 맞는 거 같다. 그렇더라도 합리적인 집단이성은 결국 대중이 제자리를 찾아가도록 해 줄 것이란 믿음을 놓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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