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미애

꿈이 영그는 사과나무

며칠 전 알고 지내던 필리핀 새댁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녀와 인연이 된 건 지역 봉사단체에서 회원들과 다문화 가정간 자매결연을 맺어주는 행사에서였다.

그녀는 서툰 한국말로 “언니. 나 필리핀 가요. 남편이 가을 일 끝나면 보내준다고 했는데 봄 일로 바빠지기 전에 엄마한테 가요.”

결혼 9년 차 새댁인 그녀는 사과농사를 짓는 남편 따라 봄이면 꽃따기, 적과, 잎소재, 사과작업, 겨울이면 전지하는 남편을 따라다니며 가지 줍는 일까지 어느 하루 바쁜 일상을 보내지 않은 날이 없다고 했다.

나무가 어렸을 때는 그래도 일이 많지 않아 그럭저럭할 만했는데 나무가 다 크고 나니 해마다 일은 늘어났고, 저온창고에 넣어 둔 사과를 다 팔아도 이렇다 하게 용돈도 한번 챙겨보지 못했다. 그러던 재작년 그녀는 남편에게 서운한 맘을 얘기했다.

“밭 귀퉁이에 있는 저 나무에서 달리는 사과는 나 줘요.”

“왜?”

“나도 농사 끝나면 나한테 선물을 주고 싶어요.”

며칠 동안 일을 따라 다니며 졸라댄 덕에 남편은 한 귀퉁이에 있던 사과나무 여섯 그루를 색시 몫으로 주었고 어른들에게도 단단히 일러두었다. 여섯 그루는 이 집 며느리 몫이라고.

그때부터 그녀는 밭에 가는 게 신이 났다. 일 끝나고 집에 오기 전에는 한 번 더 둘러보고, 꽃이 혹시 다른 나무보다 덜 나오지는 않을까 신경을 썼고, 적과도 더 정성스럽게 했다.

일을 하면서 남편에게 사과나무에 대해 이것저것 캐묻고 무엇이 나무 생장에 더 좋은지 꼼꼼히 챙겼다. 봄 가뭄이 심해지면 남편보다 더 걱정했고 수확을 앞두고 바람이 심하게 불면 행여 사과가 떨어질까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그제서야 시어른들은 며느리가 진짜 식구처럼 여겨졌다. 사는데 별로 재미가 없어하던 그전과는 다르게 며느리의 얼굴에서는 생기가 돌았다. 아침 일찍 먼저 모자를 챙겨 쓰고 나가는게 기특하기만 했다. 사과나무 여섯 그루의 힘은 참으로 어마어마했다.

그렇게 지은 작년 농사가 가뭄 탓에 알이 좀 작기는 해도 수확량은 제법 되었다. 가격도 그전 해에 비하면 괜찮은 편이라 큰 돈은 아니어도 며느리 몫을 챙겨 주었다. 며느리는 자기 나무에서 딴 사과가 몇 상자였는지 흠집 사과는 양이 얼마였는지 정확하게 계산하고 있었다.

이제 그 돈과 남편이 끊어준 비행기 티켓을 들고 필리핀 친정 부모를 만나러 간다는 것이다. 선물도 챙겼다고 한다.

맏딸인 자기가 딸 노릇, 언니 노릇 제대로 못 했는데 이번에 집에 가면 제대로 효도하고 오겠다며 들떠 있었다. 언제 돌아올 계획이냐 물었더니 “사과 꽃 피기 전에는 올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아마 작년 가을에 사과 다 따고 나무에 거름을 충분히 넣었기 때문에 올해 사과는 작년보다 더 좋을 거라고 자랑까지 곁들였다.

필리핀 친정집에 앉아 있는 그녀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마 자기가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그녀는 열심히 얘기할 것이다. 가족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도 자기 힘으로 마련한 것이라는 걸 자랑스러워할지도 모른다. 작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은 학교생활을 얼마나 잘하는지, 어쩌면 자기가 돌아가야 집안 농사일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가족들은 그런 그녀가 고맙고 대견스러워 그녀에게 눈을 떼지 않을지 모른다. 나 역시 그녀가 고맙고 대견하다. 그녀는 이제 당당한 농부다.

27년 전 농촌에 대해 아는 것 하나도 없이 남편따라 농사지으러 내려왔던 내 모습이 생각난다. 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해 시어머님과 대화를 할 수 없어 “예? 예?”를 입에 달고 살았고, 들판에 널린 봄나물을 보고도 반찬거리는 냉장고 안에서만 나온다고 믿어 밥상에 밥 한 그릇과 김치밖에 올릴 줄 몰랐던 내 모습이나 그녀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사는 인근 면에서는 생활개선회 면회장이 결혼이주여성이 당선되어 지난 주에 이·취임식을 했다. 다들 새 회장을 두고 한마디씩 했다. “참 부지런해, 인사도 잘하고, 얼마나 억척같은지 또순이가 따로 없다니까….”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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