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잎의 여자/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 시집 『사랑의 감옥』(문학과지성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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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즐겨보는 사람이라면 18년 전 기혼남성의 사랑에 관한 흔들리는 정체성을 다룬 <푸른 안개>란 주말연속극을 기억할 것이다. 그 최종회 에필로그를 장식했던 시가 ‘한 잎의 여자’다. 원작과는 달리 첫 연을 행갈이로 길게 늘여 엔딩 크래딧 처리했다. 당시 이 드라마는 평소에 멜로드라마를 외면해왔던 40~50대 남성 시청자들의 적잖은 관심을 끌었다. 반응은 갈라졌다. 불륜 미화와 선정성의 극치라는 비난이 있는가하면. 진솔한 사랑의 감정을 순수하게 잘 그렸다는 찬사도 보냈다. 20대 미혼녀와 40대 유부남의 사랑은 수많은 멜로드라마의 진부한 소재임에도 왜 그토록 ‘푸른 안개’가 큰 반향을 일으켰을까.

과거 ‘간통죄’가 시퍼렇게 살아있을 때란 점을 환기하면 전통적 윤리와 규범을 깨부순 해방론적 애정관이 적잖게 먹혀들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가정과 도덕을 가장 소중한 덕목으로 여기는 이들에겐 충격이겠으나 사랑은 제도나 도덕에 앞선다는 입장의 여성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대개는 ‘내가 하면 사랑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란 이중적인 허위의식을 드러냈다. 모든 남성들이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한 잎의 여자’에 목말라 할까.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은밀한 미숙성에 침을 꼴까닥 삼키고들 있을까. 사람들은 나무껍질을 벗겨 물에 담그면 물빛이 푸르스름해진다고 해서 붙여진 물푸레나무를 공연히 궁금해 했다.

시에서도 유행처럼 물푸레가 등장했다. ‘한 잎의 여자’가 갖는 시적 함의와는 다르게 그 아류쯤으로 잘못 인식된 ‘영계’라는 말이 한때 횡횡했다. ‘나이 어린 이성’을 성적인 것과 연관 지어 속되게 부를 때 쓰곤 했는데 인간의 양심을 무디게 하고 마비시키는 말의 다름 아니다. 지금은 함부로 뇌까렸다가는 개망신 당할 수도 있지만 과거엔 무슨 보약처럼 인식되던 시절이 있었다. 딸 같은 이웃집 아이를 성폭행하고, 선생이 제자를, 학부형이 교사를, 목사가 어린 여학생 신도를 꼬드겨 욕망을 채우고도 별로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급기야는 친딸을 상습 성폭행한 아비와 손녀를 건드린 금수만도 못한 할아비도 있다.

김학의 사건도 따지고 보면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성적 자기 결정권을 서로 존중할 수 있다면 설령 개별적으론 가정이 파탄 날지언정 누구든 성숙한 연애를 통해 ‘안개’가 걷힌 자아를 찾게 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한 잎의 여자’가 아니라 ‘영계’를 탐하는 천박하고 반인륜적인 범죄까지 용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남성들은 일시적 탐욕인 반인륜적인 못된 야수의 근성을 당장 폐기치 않으면 앞으로도 큰 곤욕을 치를 것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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