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읍 병풍처럼 휘감은 왕의 고분들…백성들 사는 모습 굽어살피시네

발행일 2019-04-04 20: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5> 고령 지산동고분군

고령군은 경북도의 남서쪽 끝에 위치하며 경남도와 붙어 있고, 동쪽은 낙동강을 경계로 대구시와 붙어 있다.

서쪽에 있는 가야산에서 대가천과 안림천의 물길이 시작돼 주변에 비옥한 평야를 만들며 대가야읍에서 합쳐지고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주산 능선 위에는 왕들의 무덤이 줄지어 늘어서서 고령군 대가야읍을 병풍처럼 감싸며 내려다보고 있다.


수많은 둥근 곡선의 봉분들이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능선을 따라 천천히 산길을 오른다. 줄지어 늘어선 왕들의 무덤은 고령군 대가야읍을 병풍처럼 감싸며 내려다보고 있다.

1천500년 전인 5~6세기에 조성된 대가야 시대의 봉분들. 사적 79호로 지정된 지산동고분군이다.

대가야고분의 특징은 높은 산 능선위에 무덤을 축조한 것이다. 지산동고분군의 대표적 대형고분들이 왼쪽부터 2, 3, 4, 5호분의 순서로 열 지어 늘어서 있다.


대가야고분의 특징 중 하나는 높은 산 위에 무덤을 축조한 것이다. 왜 능선의 정상부에 봉분을 두었을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 당시 사람들은 산 돌출부에 흙을 높이 쌓아 올려 봉분을 만들었다. 그렇게 하면, 무덤이 실제보다 더 크고 웅장하며 신성하게 보인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시야에 항상 들어오는 곳, 그것도 높이 올려다보이는 위치에 있게 된다.

무덤 주인공의 입장에서 보면, 죽은 후에도 자신의 후손인 왕들이 백성들을 통치해 가는 모습과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언제나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조상보다 더 위쪽에 묘지를 조성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당시에는 달랐다. 권세가 강한 후대로 갈수록 무덤을 위쪽에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크고 작은 고분 수백 기가 남아있다. 해방 전부터 대부분 도굴되었으나, 그 후 발굴 조사하는 등 정비작업이 착실히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달 지산동고분군에서 국내 최초로 고대 건국신화가 새겨진 유물이 발견됐다고 해서 언론의 관심이 쏠렸다.

국내 최초로 고대 건국신화가 새겨진 토제 방울이 나온 지산동고분군의 발굴조사 현장.


5세기 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름 5㎝의 토제 방울이 발굴조사 현장에서 나왔는데, 표면에 거북 등껍질 문양을 비롯해 다양한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국내 최초로 고대 건국신화가 새겨진 유물로 보인다며 문화재청이 공개한 지름 5㎝의 토제 방울.


이는 '구지가'로 알려진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기록된 ‘수로왕 건국설화’와 같다는 것이다. 삼국유사나 사기 등의 문헌에 기록된 것들이 유물에 투영된 최초의 사례라고 조사팀은 주장했다.

다양한 해석이 제기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돼 학계에서는 추가 연구가 진행돼야 그림의 실체가 명확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토기와 투구

지산동고분에서는 고령양식 또는 대가야 양식으로 독특한 토기들이 나오기도 한다. 신라계 토기와 대가야계 토기는 모양에서 차이가 난다.

지산동고분에서 출토되는 고령양식 또는 대가야 양식의 토기들이 대가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가야토기는 부드럽고 우아해 보인다. 서기 300년대 무렵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토기는 500년대 중반경에는 남해안은 물론 마산, 창원에까지 퍼져 거의 가야지역 전체에 미친다.

이처럼 넓은 지역에서 대가야양식 토기가 발견되는 것은, 그만큼 대가야의 국력이 컸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철 생산도 대가야가 국력을 키우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가야의 고분에서는 고리칼, 쇠창, 쇠도끼, 화살촉 등 많은 무기가 나온다.

이들은 전투에서 직접 사용되기도 했지만, 묻힌 사람이 살았을 때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대가야에서는 야구모자처럼 챙이 있는 투구가 발견되기도 했다.

대가야 철기 투구에는 깃털 모양의 장식을 달아 위용이 빛나게 한다. 대가야박물관 부근에 세워진 가야 철기 기마무사의 조각품.


투구의 정수리 부분에는 술같이 생긴 장식이나 깃털 모양의 장식을 달아 위용을 빛낼 수 있게 했다.

이 가운데 지산동고분에서 발견된 야구모자 모양 투구와 갑옷은 신라보다 가야지역과 일본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이 같은 유물을 통해 대가야와 일본의 문화교류가 활발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령군은 낙동강의 뱃길을 이용해 밖으로 쉽게 교통할 수 있는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대가야는 각 지방으로 통하는 도로를 가지고 있었고, 강과 바다를 오가는 뱃길을 이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남해안에 도달하는 길은 낙동강을 통하여 지금의 김해 쪽으로 나아가거나, 또 하나는 합천, 진주를 거쳐 사천 앞바다로 나아가는 길 등이 있었다.

대가야는 이와 같은 길로 소나 말이 끄는 수레와 배를 이용하여 철과 곡물, 토기 등을 내보내고 생선과 조개, 소금 등을 들여올 수 있었다.

◆금관과 금동관

대가야의 고분에서는 금관과 금동관도 여러 개 출토됐다. 대가야의 왕이 쓰던 관은 다른 나라의 관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신라의 관이 나뭇가지와 사슴뿔 모양인데 비해 대가야의 관은 풀잎이나 꽃잎 모양이다.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국보 제138호 '전(傳) 고령금관 및 장신구 일괄'과 보물 제2018호 '고령 지산동 32호분 출토 금동관'이다.

고령금관은 끝부분을 다듬어 풀꽃 모양 장식을 세우고, 양 옆에 뿔처럼 튀어나오게 만든 돌기를 달아 굽은 옥을 걸 수 있게 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국보 제138호 고령금관은 장식의 양옆에 돌기를 달아 굽은 옥을 걸 수 있게 하였다. 문화재청 제공


보물 제2018호 고령 금동관은 고령 지산동 32호분에서 출토된 유물로서, 발굴 경위와 출토지가 확실하고 함께 출토된 유물에 의해 5세기 대가야 시대에 제작된 사실이 확인됐다.

지난 2월 이 금동관은 보물로 지정됐다.

최근 보물 2018호로 지정된 ‘고령 지산동 32호분 출토 금동관’. 세련된 문양과 출토 사례가 적어 희소가치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은 가야가 각종 금속 제련 기술은 물론, 금속공예 기법에도 능해 고유한 기술과 예술문화를 형성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얇은 동판을 두드려 판을 만든 뒤 도금했는데, 일반적 금동관 형태인 출(出)자 형식과 다르게, 넓적한 판 위에 X자 문양을 점선으로 교차해 새긴 점이 특징이다.

가야시대 금동관은 출토 사례가 적어 희소가치가 있고, 현대적으로 느껴지는 단순하고 세련된 문양으로 인해 고유성이 강하다고 문화재청은 밝혔다.

보물 지정에 때맞춰 최근 국립대구박물관은 이 금동관을 상설 전시한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가야실)에서만 볼 수 있었으나, 보물지정을 기념해 대구박물관에서 전시하게 됐다.

◆44호분

다시 새소리를 들으며 산길을 중턱쯤 오르자, 다른 고분들보다 더욱 우뚝 솟아 보이는 봉분이 서 있다.

지산리 44호분이다.

주산 구릉의 맨 꼭대기에서 열 지어 늘어선 5기의 대형 고분 중에서, 남쪽 아래쪽 경사면에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굴된 대형 순장묘인 44호분. 오키나와에서만 생산되는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 조각도 나와 대가야의 해외 활동을 말해준다.
1977년 발굴 조사된 이 고분은 3기의 대형 석실과 이를 둘러싸듯이 배치돼 축조된 32기의 소형 순장 돌 덧널이 들어 있었다.

유물은 대부분이 도굴되었지만, 남은 것으로 금귀걸이·금동그릇·은장식쇠창·야광조개국자 등이 나왔다.

특히 일본 오키나와(冲繩)에서만 생산되는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 조각도 나왔다. 이는 대가야의 활발한 해외 교역 활동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다.

고분의 규모와 구조·출토유물 등으로 볼 때, 이 고분은 지금까지 발굴된 가야 고분 중 최고의 위계를 가진 왕릉으로 보고 있다.

이 고분의 특징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굴된 대형 순장묘였다는 것이다. 이로써 한국고대사에서 단편적으로 보였던 순장 기록에 대한 실체가 밝혀지게 됐다.

순장(殉葬)이란,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그를 위해 생전에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사람을 함께 매장하는 장례 행위를 말한다.

이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삶을 계속한다고 믿었던 고대인들의 관점에 따라, 이승에서의 생활을 저승에서도 그대로 누리라는 의미에서 행한 것이다.

특히 44호분에서는 30여 명 이상의 순장자가 묻혀 있어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562년 신라 장군 이사부가 이끄는 군대의 공격이 있었다. 대가야는 이 전투에서 15세 소년 장수 사다함의 5천 명 선봉대의 기습공격을 당하며 멸망했다.

16대 520년간 지속했던 ‘대왕’의 나라 대가야는 500년대 국제정세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신라에 병합되고 말았다.

대가야를 정복한 신라는 대가야의 지배층을 다른 지역으로 옮겨 흩어져 살게 했다.

가야금을 만든 우륵은 신라의 중원경(청주)으로 보내졌고, 신라의 대문장가인 강수(强首)와 명필 김생(金生)도 대가야의 후손들이지만, 고령이 아닌 다른 곳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다.

대가야 출신의 인물들은 인문과 예술로 신라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문화재청은 지난달 21일 문화재위원회 세계유산분과 심의를 거쳐, 가야 고분군(고령 지산동고분군 외 6개)을 등재 신청 후보로 선정했다.

오는 7월 문화재위원회에서 등재 신청 대상으로 결정될 경우, 문화재청은 2020년 1월 세계유산센터에 등재신청서를 제출한다. 세계유산 등재 여부는 2021년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최종 결정된다.

이에 발맞춰 고령군에서는 오는 11일부터 14일까지 ‘고령 대가야체험축제’ 행사를 가진다.

대가야 생활촌, 대가야역사테마관광지, 대가야읍 일원에서 4일간 개최된다.

고분 제268호분 아래에서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하늘과 맞닿은 곡선을 바라본다.
이제 천천히 내려와야 한다. 저 멀리 서쪽을 바라보니 미세먼지가 시야를 흐려 대가야 시조모인 정견모주가 살고 있는 가야산도 희미하게 보인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무덤을 뒤 돌아보았다.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뜻의 ’메멘토 모리‘를 느끼게 하는 지산동고분군이었다.

(글·사진= 박순국 언론인)

박순국 언론인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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