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남해왕과 노례왕 그리고 김알지||계림의 황금 궤짝에서 나온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

삼국유사는 초대 박혁거세 왕에 비해 2대와 3대왕,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에 대한 내용은 매우 간략하게 소개했다. 또 내용에 따른 남은 흔적도 많지 않아 남해왕과 노례왕, 김알지에 대한 소개를 한꺼번에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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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2대 왕은 박혁거세왕의 아들 남해왕이다. 당시 ‘왕’이라는 칭호 대신 ‘차차웅’이라 불렀다.



차차웅은 우리말로 무당을 의미한다. 무당은 제사를 모시는 사람이다. 당시 시대를 제정일치 시대로 추정하게 한다.



신라 3대 왕은 삼국유사에서는 노례왕, 삼국사기에는 유리왕으로 표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리왕으로 전한다. 14대 왕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동일하게 유례왕으로 부르고 있다.



▲ 석탈해 왕 때에 김알지가 발견된 황금궤짝이 있었던 것으로 삼국유사 등에 전하고 있는 계림.
▲ 석탈해 왕 때에 김알지가 발견된 황금궤짝이 있었던 것으로 삼국유사 등에 전하고 있는 계림.


김알지는 석탈해 왕 때 계림에서 태어난 신화를 가지고 있다. 석탈해 왕이 태자로 책봉했지만, 왕위에는 오르지 않았다.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는 뛰어난 지략가로 상당한 벼슬에 올랐을 것이며, 그의 자녀들이 왕비 등으로 왕족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결국 13대 왕에 경주 김씨가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남해왕

신라 제2대 남해왕, 남해 거서간은 차차웅이라고도 한다. 이는 존장의 칭호로서 오직 이 왕만 이렇게 불렀다. 아버지는 혁거세이고 어머니는 알영부인이며, 왕비는 운제부인이다.



전한 평제 원시 4년 갑자에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인 지황 4년 갑신에 세상을 떠났다. 이 왕을 삼황의 첫째라 한다.



삼국사를 살펴보면 이런 글이 있다. 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이라고 불렀는데 진한말의 왕이다. 어떤 사람은 귀인을 부르는 칭호라고 했다. 혹은 ‘차차웅’ 또는 ‘자충’이라고도 했다.



김대문이 말하기를 차차웅은 우리말로 무당을 이르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기 때문에 무당을 두려워하고 공경하다가 드디어는 높은 어른을 자충이라 한다고 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사금’ 이라고도 하는데, 잇금을 말한 것이라 했다.



처음 남해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노례가 탈해에게 왕위를 사양하자, 탈해가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치아가 많다고 들었다며 떡을 씹어 시험해 보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옛날부터 전해왔다.



혹은 ‘마립간’이라고도 하는데 김대문이 말하기를 ‘마립’이란 것은 우리말로 말뚝을 이르는 말이다. 말뚝 표는 직위에 따라 설치하니 왕의 말뚝이 주장이 되고, 신하의 말뚝은 그 아래로 벌려 서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했다.



역사평론가들은 신라에서 거서간과 차차웅이라고 불리는 임금이 한 분씩이고, 이사금이라 불리는 임금이 열여섯 분이며, 마립간이라 불리는 임금이 네분이라고 말했다.



신라 말기의 이름난 유학자인 최치원이 저술한 ‘제왕연대력’에서는 모두 아무 왕이라고만 불렀고, 거서간 등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그 말이 비속하고 촌스러워 부르기에는 마땅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신라의 사적을 기록함에 있어서 우리말들을 모두 그대로 두는 것도 역시 옳을 것이라고도 했다.



◆노례왕

신라 제3대 노례왕, 박노례 임금은 처음에 왕이 되었을 때 누나의 남편인 탈해왕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했다.



탈해가 “무릇 덕 있는 자는 이가 많으니 마땅히 이를 가지고 시험해 봅시다”라고 제안했다. 떡을 물어 살펴보았더니, 노례왕의 이가 많아 먼저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이 때문에 이사금이라 이름을 지었다. 이사금이라 부르는 것이 노례왕으로부터 시작됐다.



후한 유성공의 경시 원년 곧 계미년에 즉위했다. 6부의 이름을 고쳐 여섯 성을 내려주었다.



▲ 삼국유사는 노례왕 때에 최초의 향가 도솔가를 지었다 기록하며 14수의 향가를 전하고 있다. 도솔가 내용은 전하지 않고 있으나, 계림에 찬기파랑가 향가비가 있어 찾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삼국유사는 노례왕 때에 최초의 향가 도솔가를 지었다 기록하며 14수의 향가를 전하고 있다. 도솔가 내용은 전하지 않고 있으나, 계림에 찬기파랑가 향가비가 있어 찾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처음으로 도솔가를 지었는데 차사를 갖춘 사뇌격이었다. 또 쟁기와 얼음 보관창고를 만들고, 수레로 탈 것을 만들었다.





▲ 계림에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팽나무 등의 수령 1천 년이 넘은 고목 100여 그루가 지금도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 계림에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팽나무 등의 수령 1천 년이 넘은 고목 100여 그루가 지금도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김알지 탈해왕 대

영평 3년 경신(60) 8월4일에 호공이 밤에 월성 서쪽 마을로 가는데 시림 속에서 매우 환한 밝은 빛이 보였다. 자줏빛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뻗쳤는데 구름 속에는 황금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그 빛은 궤짝에서 나오고, 또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어서 이것을 왕에게 알리니 왕이 친히 그 숲으로 행차했다.



궤짝을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바로 일어났다. 마치 혁거세의 고사와 같았으므로 그 말에 따라 ‘알지’라고 이름 지었다. 알지는 곧 우리말로 어린아이를 뜻하는 말이다.



아이를 안고 대궐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면서 기뻐 날뛰며 너풀너풀 춤을 추었다. 왕이 좋은 날을 잡아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후에 파사에게 물려주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그가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 알지가 열한을 낳고, 열한이 아도를 낳고, 아도는 수류를 낳았다. 수류는 욱부를 낳고, 욱부는 구도를 낳고, 구도는 미추를 낳았다. 미추가 왕위에 올랐으니, 신라의 김씨는 알지에서 시작되었다.



▲ 월성의 북쪽 성벽에 가까이 설치된 석빙고 내부.
▲ 월성의 북쪽 성벽에 가까이 설치된 석빙고 내부.
◆흔적

△도솔가와 석빙고: 신라 3대 유례왕 당시 향가로 알려진 도솔가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도솔가의 내용은 전하지 않지만, 일연선사가 지은 삼국유사에는 14수의 향가 가사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어 오늘날 문학의 뿌리가 되고 있다.



▲ 월성의 북쪽 성벽에 가까이 설치된 석빙고 정면.
▲ 월성의 북쪽 성벽에 가까이 설치된 석빙고 정면.


또 이때 얼음을 보관하는 창고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 위치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신라시대 것으로 보기 어렵지만, 월성에 석빙고가 고스란히 당시 형태를 갖추고 남아 있어 추정해 볼 뿐이다.



▲ 월성의 석빙고 제작에 대한 내력을 싣고 있는 비석. 석빙고 바로 서편에 서 있다.
▲ 월성의 석빙고 제작에 대한 내력을 싣고 있는 비석. 석빙고 바로 서편에 서 있다.


지금 월성에 있는 석빙고는 조선시대에 서쪽 100여m 지점에서 현재 있는 곳으로 이전해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 비석이 있고, 머릿돌에 이전 개축했다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조선시대에 석빙고를 이전했다고 짐작하게 한다.



▲ 조선시대 석빙고가 현재 위치로 옮겨가기 전에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웅덩이.
▲ 조선시대 석빙고가 현재 위치로 옮겨가기 전에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웅덩이.




△쟁기와 수레: 유례왕은 또 쟁기와 탈 것으로 수레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남아 있다. 쟁기를 만들어 농사를 쉽게 하는 경작법으로 생산성이 많이 늘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 삼국유사에는 3대 노례왕 때에 수레를 제작해 탈것으로 활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신라미술관 내부에 박물관 건립 당시에 드러난 신라시대 수레바퀴 자국.
▲ 삼국유사에는 3대 노례왕 때에 수레를 제작해 탈것으로 활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신라미술관 내부에 박물관 건립 당시에 드러난 신라시대 수레바퀴 자국.


또 수레를 만들어 탈 것으로 이용했지만 단순한 이동수단뿐 아니라, 농산물 등의 짐을 싣는 용도로도 사용해 농업을 비롯한 산업발전에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시기로 이해된다.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미술관 안에는 신라시대 수레바퀴 자국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당시 운송수단이 이용되었다는 것을 실증하고 있다.



▲ 계림은 2천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고목이 울창한 숲을 이뤄 전설과 함께 사계절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고 있다.
▲ 계림은 2천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고목이 울창한 숲을 이뤄 전설과 함께 사계절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고 있다.


△계림: 계림은 첨성대와 월성 사이에 위치해 지금도 울창한 숲으로 도심의 허파 기능을 하고 있다.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유서 깊은 곳으로 ‘시림’으로도 불렸다.



신라 탈해왕 때 월성 옆의 숲 금궤에서 아이가 나와 성을 김(金)이라 하고 이름을 ‘알지’라 불렀다. 이때부터 구림이라 부르던 숲을 ‘계림’이라 부르고, 나라 이름도 ‘계림국’으로 불렀다.



▲ 계림 내부에 조선시대 김알지의 탄생 설화를 기록한 비석을 세운 비각이 있다.
▲ 계림 내부에 조선시대 김알지의 탄생 설화를 기록한 비석을 세운 비각이 있다.


△계림비각: 계림 안에는 조선시대 순조 3년 1803년에 김알지 탄생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비석을 세우고 누각을 지어 보호하고 있다.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존재와 계림의 역사를 확인하게 하는 시원이 되고 있다.



△고목 회화나무: 계림에는 왕버들과 느티나무, 회화나무, 팽나무 등의 고목들이 울창하게 들어서 있다. 수령 1천여 년에 이르는 고목도 1백여 그루나 된다.



계림 입구에 본래의 줄기가 고사하고 가지가 자라 겨우 살아 있는 수령 1천300년이 되는 회화나무 고목이 있다. 우레탄 수술로 수간부 10%가 겨우 살아, 여름이면 푸른 잎을 틔운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김알지 장군의 포석

유례왕이 즉위해 육부촌을 다독이기 위해 각자 그들에게 신라 고유의 성씨를 내리고 직위와 다스리는 땅의 구역을 설정해 주었다.



월성의 서북 방향으로 북천 아래 지역, 알천 양산촌 경주 이씨의 성을 부여받은 알평 촌장과 이웃해 서로 협력하며 지내는 부족이 있었다.



당시 왕가에서는 경주 이씨들이 전체를 아우르며 잘 다스릴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알천의 또 다른 부족장 호령의 지혜와 힘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호령 촌장의 아들 알지는 무공이 뛰어나고 지략이 남다르며 친화력과 지도력이 탁월해 따르는 무리들이 많았다. 호공은 이러한 내력을 월성에 살면서 속속들이 살피고 있었다. 어느 날 양산촌이 왕권에 상당한 위협이 될 것이라 염려하여 석탈해왕에게 보고했다.



▲ 계림에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팽나무 등의 수령 1천 년이 넘은 고목 100여 그루가 지금도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사진은 수령 약 1천300년 되는 회화나무로 우레탄 수술을 했다. 10% 정도 남은 수간부로 아직 싹을 틔우고 있다.
▲ 계림에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팽나무 등의 수령 1천 년이 넘은 고목 100여 그루가 지금도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사진은 수령 약 1천300년 되는 회화나무로 우레탄 수술을 했다. 10% 정도 남은 수간부로 아직 싹을 틔우고 있다.


석탈해 왕은 호령 촌장에게 늦게 경주 김씨 성을 내리고 호령의 아들 알지를 왕궁으로 불러들여 벼슬을 주고, 사위로 삼아 내란을 미리 예방했다.

석탈해 왕의 지혜는 석씨 가문만을 위함이 아니라, 신라를 안정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정책을 다양하게 개발해 과감하게 실행했다.



김알지와 알평촌장은 그 이후에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외세의 침략에 공동으로 맞서 부족을 지키는 한편, 나라의 일을 위해 지속해서 협력하며 우호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나중에는 양산촌의 알평 촌장보다 호령 촌장의 세력의 커지면서 김알지의 후손인 미추가 왕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양산촌은 지리적으로 불리하고, 세력이 상대적으로 열세를 면하지 못해 왕권을 미추왕 당대에 그치고 70여 년이 지나 17대 내물왕부터 김씨 왕위 세습체제를 굳혔다.

김씨 왕위세습의 터전은 김알지가 처가 석씨 집안과 왕족이었던 박씨 집안 세력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안으로 세력을 키운 전략의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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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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