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

성민희

재미 수필가



뒤뜰이 소란하다. 얕은 흙을 밀치고 속속 고개를 내미는 새싹. 어느새 키가 훌쩍 자란 노랑, 분홍 튤립은 얼굴을 마주하며 속살대고 보랏빛 아이리스는 바람 따라 흔들린다. 휘황한 봄빛의 군무 위로 쏟아지는 햇살. 정말 봄이다.

4월이 되면 나도 모르게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벨테르의 편질 읽노라.’ 멜로디를 흥얼거린다. 교정 등나무 아래에 앉아 목청껏 노래를 부르던 갈래머리 여고시절.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때 내 마음을 적셨던 베르테르의 슬픔이 찾아와 나는 설렌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고 가슴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가 가끔씩 고개를 드는 그리움이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햇살이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하품을 하는 오후. 잠깐 밖으로 나와 보라며 친구가 전화를 했다. 대문을 열고 보니 친구는 쌀자루 두 개는 합한 것만큼 큰 비닐보따리를 들고 낑낑댄다. 내가 좋아하는 땅콩과자. 일 년 내내 먹어도 족히 남을 양의 땅콩과자 보따리를 내 생일 선물이라며 들이민다. 각종 도매상이 밀집해 있는 LA자바시장에 옷감을 사러 갔는데. 과자 도매상 앞을 지나다가 이것이 보이기에 차를 세웠단다. 그 복잡한 거리에서 파킹 자리를 찾느라 얼마나 헤매었을까. 생일 지난 지가 언젠데? 눈을 홀기는 나를 뒤로하고 바쁘다며 뛰어가는 친구의 모습에 마음이 울컥한다.

하버드대에서 1938년부터 75년 동안 700여 명의 남성을 선정하여 10대부터 80대까지의 인생 데이터를 작성했다는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매년 피를 뽑고 뇌를 촬영하는 등 의료 기록을 체크하고 본인은 물론 10대에는 부모님을, 성인이 되었을 때는 배우자와 자녀들까지 인터뷰를 하여 그들의 인생 여정을 빈틈없이 추적한 스케일이 방대한 실험이다. 그 결과 건강을 유지하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주위에 ‘좋은 관계’의 사람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실험이 주는 분명한 메시지는 우리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삶이란 ‘좋은 관계’라는 것이다. 젊은 시절의 그들은 부와 명성, 높은 성취를 인생의 최고 가치로 여겼지만 황혼 고개를 넘은 지금은 주위에 좋은 가족과 친구, 보람을 느끼며 활동 할 수 있는 공동체가 가장 소중한 인생 자산이라고 말한다. 누군가와의 바람직하고 따뜻한 관계는 몸은 물론 뇌의 건강도 지켜준다. 그런 사람은 신체적인 고통이 심한 날에도 마음은 행복하며 치매에 걸릴 확률도 적다. 반면 불행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신체적인 고통이 심한 날에는 감정적인 아픔까지 겹쳐 고통이 더욱 극대화된다. 사람은 사회적 연결이 긴밀할수록 삶에 활력이 넘치고 정신도 맑아진다. 또한 내가 어려울 때에 진정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든든함은 나이를 먹는 고통의 완충제 역할을 한다고 한다. 가장 행복한 삶을 산 사람은 그들이 의지할 가족과 친구와 공동체가 있는 사람이라는 결론이다.

좋은 관계의 사람은 수가 얼마나 많은지, 남이 보기에 안정적이고 공인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관계의 질이 중요하다. 아무런 마음의 거리낌 없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줄 수 있는, 너와 함께 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 단 한 명만이라도 이런 친구나 가족이 있다면 성공한 사람이다.

돌아보면 우리가 산다는 건 시간에 얹혀 그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촘촘히 생을 짜내는 작업이다. 사건을, 사람을, 감정을 씨줄과 날줄로 서로 엮는 일이다. 좋은 사람과의 관계라야 좋은 사건을 만들고 좋은 사건에서 좋은 감정도 생긴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감정의 도를 최고조까지 끌어올릴 수도 있고 바닥까지 끌어 내릴 수도 있다. 긍정의 에너지를 발산할 수도 있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도 느낄 수가 있다.

마크 트웨인은 말했다. ‘시간이 없다. 인생은 짧기에 다투고 사과하고 가슴앓이하고 해명을 요구할 시간이 없다. 오직 사랑할 시간만이 있을 뿐이며 그것은 말하자면 한 순간이다.’

행복하려면 행복한 사람 옆으로 가라는 말도 있다. 지금 내 곁에서 행복을 함께 엮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돌아보고 소중이 여길 일이다.

아직도 ‘4월의 노래’에 마음이 설레듯 늦은 생일을 챙겨주고 차에 오르는 친구의 모습은 먼 훗날 또 다른 그리움으로 남을 것 같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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