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사랑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시절, 참 좋은 때임을 실감하는 날이다. 비에 씻긴 대지 위로 파란 하늘이 한결 더 평화롭게 펼쳐진다. 활짝 꽃잎이 벙근 영산홍은 담장 사이로 고개를 쏘옥 내밀어 인사를 건네고 앙증맞게 고운 분홍의 꽃 잔디들은 소복이 모여 앉아 길손의 발걸음을 붙든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봄날이 저물어 간다. 잠깐이라도 하염없이 거닐어 보고만 싶은 순간이다.

언젠가는 충남 태안의 천리포 수목원을 꼭 한 번만이라도 들러봐야지 하고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기회가 닿지 않아 가보지는 못하였지만, 내게는 그곳 못지않은 행복감을 가져다주는 이곳 주말 주택이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된다. 몇 주에 한 번 또는 몇 달에 한 번씩 정말 가끔 밖에 들러 길손처럼 왔다가 가는 곳이지만 어느새 마음 한구석엔 고향으로 자리 잡았다.

마당에 울창하게 드리워진 소나무 숲 그늘에 가려 목련은 아직 채 피지 않았지만, 햇살이 비켜 드는 길목에는 꽃 사과 하얀 꽃들이 셀 수도 없이 달려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어머님 떠나실 때 가져다 심은 천리향도 어느새 피어나 은은한 향기를 풍기고, 오랫동안 환자로 다니던 아이가 가져다 심어 준 라일락은 보랏빛 꽃송이들을 하늘로 뻗어 올려 구름을 이루고 있다. 작은 나무에 얼마나 많은 가녀린 꽃들이 하늘 향해 뻗어있는지 그 모습을 보니 안간힘을 쓰며 나 좀 보아달라고 하는 것 같아 나의 눈길은 온통 그 아이를 본 듯 그 나무로 쏠린다. 지금 건강하게 자라나는 바로 그 아이, 그 나무!

기적은 아주 사소하게, 일상 속에서 나타나지 않던가. 하나하나 깨달으며 조금 더 자신을 믿게 되고, 또 가족들의 도움으로 조금 더 삶에 충실하게 되고 주변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이면서 관계를 좋게 하다보면 차츰 더 나아지고 시간이 지나면 더 좋은 일이 생기지 않던가.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지치지 말고 꾸준히 끝까지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이 끝내 승자가 되는 것일 터이니.

향기를 머금은 상큼한 봄바람이 기분 좋아 길가에 서 있으려니 눈을 덮은 사자처럼 생긴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분들이 내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는 분이 아닌가. 손을 맞잡으며 인사를 건네니, 날씨가 좋아 오랜만에 드라이브를 나왔다며 자신이 사는 전원주택과 비교도 해 볼 겸 봄볕을 즐기는 중이라는 것이 아닌가. 팔공산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서 이곳저곳에 전원주택들이 곳곳에 많이 들어서 있는 모양이다. 지인의 어머님은 구순이 넘었다는 데도 걸음걸이가 반듯하고 허리도 꼿꼿하여 젊은이 못지않은 자세로 걷는 속도가 남다르게 빠르셨다. 검은 개 차우차우가 이리저리 다니며 설쳐 대어도 그를 감당할 만큼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이 감동적이어서 놀라웠다. 강아지 운동에 발맞추어 그분은 더 운동이 되는 듯 즐겁게 따라다니시는 모습이 선수 못지않은 그분께 궁금하여 여쭈어보았다. 연세를 이기고 건강하게 지내시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그러자 그분은 스스럼없이 큰 소리로 대꾸하신다. “속 썩이는 자식 때문에! 내가 늙을 수가 있겠어“. 깜짝 놀랐다. 자식이 환갑 진갑 다 지났지만, 아직 결혼도 하지 않고 저렇게 혼자서 돌아다니며 살고 있다고 하시며 눈을 흘기신다. 그러기에 혼자 있는 자식이 걱정되어 빨리 결혼하는 모습을 보아야 하기에 늙어서도 안 되고 또 이 세상에서 없어져서도 안 된다는 굳은 의지로 살고 계신다고 하였다. 그러니 누구보다도 더 건강을 잘 챙기며 오래오래 이 세상에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가 있다고 강조하신다. 그러니 시간 날 때마다 더 많이 걷고 더 많이 챙겨 먹고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고, 미혼인 자녀에게는 결혼하라고 다그치면서 어머니로 역할에 충실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실 것이란 의미이리라.

부모님 걱정 끼쳐 드리지 않고 잘해드리고 마음 편하게 해드리는 것이 진정한 효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 이분들처럼 알콩달콩 사랑을 담은 말다툼을 해가면서 맑은 하늘 아래, 향기로운 꽃향기 맡으며 따스한 봄볕을 등에 받으며 산천을 걸어 이야기꽃을 치우는 모습을 보면서 왠지 모를 부러움이 내 마음엔 가득 일었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강력한 동력은 어쩌면 두려움과 사랑일지 모르겠다. 두려움으로 가득하면 원망이 생기고 그에 따라 좋지 않은 결과가 따라 오게 되기도 한다. 그것을 사랑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원망을 점점 제거하는 연습을 하고 사랑을 더 주려고 하니까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차츰 더 좋은 일이 생기게 되지 않을까 싶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또 진정한 효도란 무엇일까? 문득 생각해 보는 아름다운 봄날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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