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며 산다는 것은 / 조기영

발행일 2019-04-28 15:08:22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시를 쓰며 산다는 것은/ 조기영

시를 쓰던 어느 날 거짓말 한번 있었습니다. 밥을 먹어야 하겠기에 돈을 벌러 나갔다가 주머니에 돈이 없어 같이 일했던 사람에게 급히 나오느라 지갑을 놓고 나왔으니 이천 원만 빌려 달라 했습니다. 그 돈 빌려 집에 오는 길에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날따라 비조차 내렸습니다. 우산 없이 집으로 오는 길은 이미 어두웠습니다. 많은 생각들이 머리 속을 스쳐갔습니다. 그러나// 내안에 주머니가 비어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야. 하지만 마음이 비어 시를 쓸 수 없게 된다면 더욱 슬픈 일이 될 거야// 이 말 한마디 하고 내게 웃었습니다.

- 시집『사람은 가고 사랑은 남는다』(살림터, 2000)

2005년 미모의 아나운서와 11년 연상인 가난한 시인의 결혼이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KBS 고민정 아나운서와 조기영 시인이 화제의 주인공이다. 별로 유명한 시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번듯한 다른 직업을 갖고 있거나 제대로 돈벌이를 하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그들의 사랑과 결혼이 사람들에겐 특별해 보였던 것이다. 더구나 조기영은 강직성 척추염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었다. 고민정씨는 덕분에 ‘시인의 아내’라는 별칭을 얻었으나, 그것에는 얼마든지 좋은 혼처를 찾을 수 있는데 왜 하필 궁기 가득한 시인이냐는 뜨악한 시선이 내포된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그녀에겐 아나운서가 된 이후 줄곧 맞선 제의가 쏟아져 들어왔고, 부모 입장에서도 더 좋은 조건의 혼처가 많은데 나이 많고 경제적 능력도 없는 시인에게 딸을 주기가 주저되어 딸에게 신중할 것을 조언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지금까지 둘 사이에 아들딸을 두고 잘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히려 “남편이란 존재가 없었다면 제가 이렇게까지 부각될 수 있었을까요. ‘가난한 시인’과 결혼한 덕에 오히려 남편 덕 보고 사는 걸요.”라면서 이젠 자신이 그의 꿈이 되겠노라고 했다.

그녀는 남편을 통해 시를 잃어가는 시대에 시인이란 직업을 지키는 쓸쓸함과 진지함을 읽었고, 직업시인으로 산다는 것이 참으로 녹록치 않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고민정 아나운서는 요절한 최고은 작가를 애도하며 남편을 언급한 바 있다. 당시 "마치 결혼 전 옥탑방에 살던, 지금은 내 동반자가 된 그 사람이 당한 일 같아 자꾸 가슴이 아파온다"며 "연애시절 보게 된 그의 시에서 그는 몇백원이 없어 몇 시간을 걸어 집에 갔다고 했다.

‘시를 쓰며 산다는 것은’ 최고은의 사망 기사 밑에 누군가 댓글로 썼듯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 글만 쓰고 있었나, 재능이 없다 싶으면 포기해야지, 왜 맨땅에 헤딩하나. 따위의 딱한 시선과 조롱을 감내해야함을 의미한다. 그 외 ‘세상물정 모르고 꿈만 좇는 철부지’로 치부하는 댓글들도 많았다. 이는 본인이 원하고 제 좋아서 하는 일은 예술 아니라 그 할애비라도 노동이 아니라는 통념에서 비롯한 균열된 시선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문화예술인은 작품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고 감동을 주는 예술가이거나, 제 앞가림도 못하는 백수건달 둘 가운데 하나다. 조기영 시인은 물론 대부분 후자 쪽에 속하며, 그들은 늘 주머니도 마음도 비어있을 때가 많아 슬프다. 그런데 조 시인은 아내를 잘 만나(좀 예의 없는 표현이지만 사실이므로) 일거에 이런 구차함을 벗은 좀 특이한 사례다. 다 호상간의 홍복인 것이다. 청와대 대변인으로 승진한 고민정씨 가족에게 행복이 늘 함께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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