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축다이얼 4/ 배옥주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고……”/ 오늘은 49재/ 부재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이얼 4를 길게 누르면/ 나의 ‘여왕’은 여전히 출타 중이다// 엄마의 오솔길엔 찔레 향기 깊어지는데/ (둥략)// 은수저 저 혼자 달그락거리는 아침/ 단축다이얼 4를 누르면/ 내 귓바퀴 속으로 두런두런 걸어오는 음성, 돌아보면/ 물안개 너머로 아득해지는// 강 건너 저쪽으로 새 한 마리 날아오르고/ 하루에도 몇 번씩/ 도무지 닿을 수 없는 결번의 얼굴을 눌러 본다

- 시집『오후의 지퍼들』(서정시학,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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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축다이얼의 순번으로 관계의 중요함이나 친밀도를 가늠하긴 어렵겠으나, 친정엄마의 휴대폰이 ‘단축다이얼 4’인 것은 출가한 딸에게 예상되는 순번이다. ‘넘버 3’도 아니고 ‘넘버 4’지만 일단 ‘넘버9’ 안에 들었으니 아주 후순위는 아니다. 그런데 나 같으면 네트워크 교류의 빈도와 상관없이 ‘넘버 1’으로 후하게 대접할 것도 같다. 하지만 불행히도 내 어머니는 생전에 휴대폰을 가져보지 못했으므로 아예 단축다이얼 순번이란 게 없다. 언젠가 효도폰이란 게 출시되어 한창 광고에 열을 올릴 때 넌지시 의향을 물었더니 손 사례를 치셨다. 그럼에도 늘 ‘넘버 1’ ‘여왕’으로 굳건히 집 전화를 지키셨다.

어머니 가신지 지난 4월26일로 3년이 되었다. 옛날식으로 쳐도 이제 완전 탈상을 한 셈이다. 사람이 죽으면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 49일 동안 이승과 저승 경계에 영혼이 머무는데 이 기간을 넘겨야 비로소 다음 생을 받는다고 한다. 마치 사람으로 태어나기 전 태아 상태로 열 달 간 엄마의 자궁 속에서 배양되는 것과 같은 이치에서 49일간의 환생을 위한 과정인 것이다. 즉, 죽은 자로 하여금 내세에서 좋은 생을 받기를 바라는 뜻에서 명복을 비는 불교식 탈상이 49재이다. 특히 불교에서는 윤회를 믿기 때문에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49재를 올린다. 그런데 나는 49재와 상관없이 어머니를 온전히 떠나보내지 못했다.

어머니를 가톨릭묘원에 모신 입장이기에 별도로 49재를 챙기지는 않았으나 수시로 두 달에 한번 정도는 잠깐씩 군위묘원에 다녀오곤 했다. 이제는 그렇게 자주 찾아뵙지는 못할 것 같다. 군위묘원 가는 길 삼거리 오른쪽 언덕에는 김수환 추기경 풀집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그리고 3년 전에는 공사 중이었으나 지금은 기념관도 완공되었다. 완공 이후 한 번도 들리진 않았으나 이번에는 돌아오는 길에 둘째와 함께 이곳을 찾았다. 맨 처음 눈길을 끈 것은 동그마니 놓여있는 옹기들이었다. ‘옹기’는 김수환 추기경의 호이기도 하다. 또한 옹기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박해와 신앙의 상징으로 전해져온다.

가톨릭 선조들을 박해를 피해 산으로 숨어들어 독을 짓고 옹기를 내다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 추기경의 아버지도 그렇게 신앙을 지킨 가난한 옹기 장수였다. 질박한 성품에 세상을 너그럽게 품었던 추기경의 삶은 옹기를 그대로 닮았다. 옹기는 음식뿐 아니라 무엇이든 담는다. “이 세상에는 옹기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생전 추기경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이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자 등신대의 추기경 동상이 반긴다. 손을 잡으니 온기가 전해진다. 실제로 동상 내부에 열선을 설치해서 사람의 체온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나는 동상을 껴안으면서 어머니의 체온과 음성을 함께 느꼈다. “애비야, 우야든동 단디 살아라”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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