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 / 정호승

발행일 2019-05-01 16:12: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선암사/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비,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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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가 위치한 소백산맥의 끝 줄기 조계산은 해발 889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동쪽에 선암사를 서쪽엔 송광사를 품은 불교의 성지라 불리는 곳이다. 그 선암사에는 국가 민속자료로 지정된 400년 된 변소가 있다. 화장실이 문화재로 지정된 곳은 아마 세계에서 유일하지 싶다. 유홍준 교수는 세계에서 가장 운치 있는 화장실이라고 극찬하였으며, 김훈은 기행에세이집 <자전거 여행>에서 이곳 선암사 '뒤깐'에서 똥을 누어보면 비로소 인간과 똥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똥을 누는 것은 몸의 찌꺼기인 배설물을 밖으로 내보내는 자유와 해방의 행위며. 그 장소는 서늘함과 홀가분함이 있는 해방공간이어야 최상이다. 그렇게 보면 선암사 화장실이야말로 그 자유의 파라다이스라는 것이다. 지난 주말 외사촌동생의 아들이 순천 색시를 얻어 혼례를 치른 바람에 순천에 다녀왔다. 뇨의를 쥐어짜 뒤깐에서 소변을 해결했다. 선암사 ‘뒤깐’은 남녀 칸이 같은 건물 안에서 양옆으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각자 똥깐에 서 있을 땐 서로를 볼 수 있고, 쭈그리고 앉으면 안보일 만큼의 높이로 칸막이가 쳐져있다.

화장실 남녀 칸의 관계가 철벽으로 무식하게 막아놓은 것 보다는 오히려 문명적이지 않은가. 그것은 억지로 떼어놓을 것이 아닌 자연스럽고 은근한 구분이어야 한다는 뜻의 다름 아니다. 국회의장이 한 여성의원의 볼을 만진 행위는 부적절했지만 그렇다고 성추행이라니 나가도 너무 나갔다. 남녀관계가 이 같은 양상으로 치닫는 세상이 문득 두렵다. 얼마 전 지하철역 화장실을 들렀는데 어떤 사람이 긴 머리를 빗으로 빗고 있지 않은가. 나는 화들짝 놀라 혼비백산 튀어나왔다. 순간 치한으로 오해받겠다 싶어 식겁했는데 긴 머리 남성이었다.

인간이 선계로 드는 입구이자 신선이 되어 출구로 나온다는 선암사는 경관 또한 빼어나지만 무엇보다 번잡한 상가들이 없어서 좋았다. 많은 시에 등장하는 유명한 선암사 홍매화는 져버렸지만 동백은 이제야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지금은 겹벚꽃이 화려하고 풍성하게 만개하였다. 해우소에 앉아 창문을 바라보면 그림 같은 숲속 경관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근심을 풀고 번뇌가 사라진다는 ‘해우소’의 뜻과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 ‘선암사 해우소’이다. 그런 선암사 뒤깐만큼 시의 소재로, 문화의 향기로 다루어지는 화장실이 또 어디 있을까.

정말 똥 썩는 냄새마저도 은은하고 향기로운지 알아보려고 십년 전 그 배설의 낙원에 앉아 코를 벌렁댄 적이 있다. 또 기회가 온다면 엉덩이를 다시 까볼 참이다. 정말 그 똥깐에 앉아 구린내 속에서 번뇌와 근심 다 털어내고, 욕망의 찌꺼기 깨끗이 비워내며, 실컷 울면서 위로까지 받는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헛된 욕심의 총화인 인간이 부처님 오신 날의 뜻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헤아린다면야 똥오줌 누듯 망집의 욕망도 훌훌, 이기의 옹졸도 훌훌 우리 몸 밖으로 내던질 수 있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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