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내물왕·김재상||고구려와 왜나라 볼모로 잡힌 눌지왕의 두 동생 죽음으로 구해낸 김제

내물왕은 신라 17대 왕으로 본격적인 김씨 왕조 세습의 시작이다. 삼국유사는 내물왕과 눌지왕의 업적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당시 김제상(삼국사기에는 박제상)의 일화를 길게 소개하고 있다.



김(박)제상은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있는 내물왕의 동생 보해(삼국사기 복호)를 구해온 데 이어, 왜에 잡혀 있는 내물왕의 또 다른 동생 미해(삼국사기 미사흔)를 구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돌아온 이후 집에도 들르지 않고 내친걸음으로 바로 왜국으로 떠났다.



이 때문에 김(박)제상의 부인이 치술령에서 바라보다 망부석이 되었고, 벌지지, 치술신모와 은을암 등의 흔적과 설화를 남기게 되었다.



삼국유사가 소개하는 충신 김(박)제상과 그의 부인 이야기를 소개하고, 설화를 고증하는 흔적이 있는 경주와 울산의 현장으로 가본다. 내물왕과 실성왕, 눌지왕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호에서 상세하게 더듬어보기로 한다.



▲ 치술령 망부석에서 동해를 바라보는 전경. 안개 때문에 동해를 볼 수 있는 날이 드물다.
▲ 치술령 망부석에서 동해를 바라보는 전경. 안개 때문에 동해를 볼 수 있는 날이 드물다.


◆삼국유사 내물왕 김제상

신라 제17대 내물왕이 왕위에 오른 지 35년이 되는 경인(390)에 왜왕이 사신을 조정에 보내와서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한 분의 왕자를 보내시어 저희 임금에게 성의를 표하여 주시옵소서”라 했다.



이에 왕은 셋째 아들 미해로 하여금 왜국을 예방하게 했다. 미해는 당시 10살이어서 말과 행동이 아직 미숙해 내신인 박사람을 부사로 삼아 보냈더니, 왜왕이 붙들어 두고 30년 동안이나 보내지 않았다.



눌지왕이 왕위에 오른 지 3년 되는 기미(419)에 고구려 장수왕이 보낸 사신이 와서 말하기를 “저희 임금이 대왕의 아우님 되시는 보해께서 지혜와 재주가 뛰어나다는 말을 들으시고 서로 친하기를 원하여 각별히 소신을 보내어 간절히 청하도록 하였습니다”라 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이 일로 인하여 화친하게 된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여겨 그의 아우 보해에게 명령을 내려 고구려로 가게 하면서 내신 김무알을 보좌로 임명하여 보냈더니, 장수왕도 또한 그들을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눌지왕이 왕위에 오른 지 9년 되는 을축(425)에 여러 신하와 나라 안의 호협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친히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왕이 여러 신하에게 “예전에 돌아가신 우리 아버님께서 성심으로 백성을 위하신 까닭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동쪽의 왜에 보내었다가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 또 짐이 고구려가 화친하자고 하여 사랑하는 아우를 고구려에 보냈으나 고구려 역시 잡아두고 돌려보내지 않았다”며 슬퍼했다.



관리들이 삽라군 태수 제상이 적임이라 추천했다. 이에 왕이 제상을 불러서 물으니 제상이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신이 듣기로는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을 보고,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했사옵니다. 신은 비록 똑똑하지 못하나 왕명을 받들어 행하고자 하나이다”라 했다. 왕이 그를 매우 가상히 여겨 술잔을 나누어 마시고 당부했다.



제상이 변복하고 고구려로 들어가 보해의 처소로 가서 함께 도망갈 날짜를 모의했다. 제상이 먼저 5월15일에 고성 포구로 돌아와 배를 대고 기다리기로 하였다. 약속한 날이 닥쳐오자 보해는 병을 빙자하여 며칠이나 조회에 참석지 않다가 밤중에 도망을 쳐 고성해변에 닿았다.



▲ 박제상 유적지에 조선시대 건립해 복원된 치산서원과 홍살문.
▲ 박제상 유적지에 조선시대 건립해 복원된 치산서원과 홍살문.


고구려왕이 사람들을 시켜 그들을 추격해 고성까지 와서야 따라잡았다. 그러나 보해는 고구려에 있을 때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군사들이 그들이 다치는 것을 불쌍히 여겨 모두 화살촉을 뽑고 활을 쏘았기 때문에 마침내 무사히 돌아왔다.



왕이 보해를 보자 미해를 더욱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기쁘고 또 한편으로는 슬퍼하며 말하기를 “한 몸뚱이에 한쪽 팔만 있고 얼굴 하나에 한쪽 눈만 있는 것과 같소이다. 비록 동생 하나는 찾았으나 또 한 동생이 없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겠소”라 했다.



▲ 치술령 망부석으로 오르는 길은 경사가 가파르다. 등산로 곳곳에 설치된 벤치.
▲ 치술령 망부석으로 오르는 길은 경사가 가파르다. 등산로 곳곳에 설치된 벤치.


그때 제상이 이 말을 듣고 두 번 절하여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한 후, 말을 타고 집에도 들리지 않은 채 떠나 곧바로 율포 바닷가에 도착했다. 그의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율포까지 쫓아왔으나 그의 남편은 이미 배 위에 올라 있었다. 그의 아내가 애절하고 간절하게 불렀으나 제상은 단지 손만 흔들 뿐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떠나서 왜국에 도착하여 거짓으로 말하기를 “계림왕이 아무 죄도 없는데 저의 부친과 형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이곳으로 도망했습니다”라 하니 왜왕이 이 말을 믿고 집을 주어 그를 편안하게 했다.



이때부터 제상은 항상 미해를 모시고 바닷가에 나가 놀면서 물고기와 새를 잡아서 매번 왜왕에게 바쳤더니 왕은 크게 기뻐하며 의심하지 않았다. 때마침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어둡게 되자 제상이 말하기를 “떠나가실 수 있습니다”라 하니 미해가 “그러면 함께 갑시다”라 했다. 제상이 “신이 만약 간다면 왜인들이 알아차리고 뒤를 쫓아올까 염려가 돼 오니 신은 남아서 뒤쫓는 것을 막도록 하겠습니다”라 했다.



미해가 “지금 나와 그대는 부모·형제와 같은데 어찌 그대를 버리고 나 홀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이오?”라 하니 제상이 “신은 왕자님의 목숨을 구하여 대왕의 마음만 위로하면 그것으로 만족하오이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라 하면서 술을 따라 미해에게 드렸다.



이때 계림사람 강구려가 왜국에 와 있었는데, 그 사람으로 하여금 따라가게 하고 제상은 미해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 주위의 사람들이 들어가 보려 했으나 제상이 나와서 “어제 사냥을 하시느라 말을 타고 쏘다니셨기 때문에 몹시 피곤하여 일어나지 못한다”라며 말렸다. 해가 기울어질 무렵에 주위의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다시 물으니 “미해는 이미 오래전에 갔다”고 하자 그들은 급히 달려가 왜왕에게 보고했다. 왕은 말 탄 병사들로 하여금 그를 쫓게 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했다.



이에 제상을 가두고 심문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너의 나라 왕자를 몰래 보냈느냐?”라 하니 제상이 “나는 계림의 신하이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다. 이제 우리 임금의 뜻을 성취하고자 할 뿐인데 어찌 구태여 그대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라 했다.



왜왕이 화를 내며 “지금 너는 이미 나의 신하가 되었는데도 계림의 신하라고 한다면 응당 온갖 형벌을 가하겠지만, 만약 왜국의 신하라고 말한다면 반드시 후한 녹봉을 상으로 주겠다”라 했다.



제상이 대답하기를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으며, 차라리 계림의 매를 맞을지언정 왜국의 벼슬과 녹봉은 받지 않겠다”라 했다.



▲ 박제상 유적지에 건립된 박제상추모비.
▲ 박제상 유적지에 건립된 박제상추모비.


왜왕이 화가 나서 제상의 발바닥 살갗을 벗기고 갈대를 베고는 그 위를 걷게 하였다. 다시 묻기를 “너는 어느 나라 신하냐?”라 하니 대답하기를 “계림의 신하다”고 했다. 다시 그를 뜨겁게 단 철판 위에 서게 하고 “어느 나라 신하인가?”라 물었다. 제상이 역시 “계림의 신하이다”라 하자 왜왕은 그를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목도에서 불에 태워 죽였다.



미해가 바다를 건너와서 강구려를 시켜 먼저 나라에 알렸더니 왕이 크게 기뻐하며 모든 관리로 하여금 굴헐역에서 맞이하도록 했다. 왕이 친아우 보해와 함께 남쪽 교외에서 맞이하여 대궐로 들어가 연회를 베풀었다. 나라 안에 죄 있는 사람들을 용서하여 크게 풀어주었으며 제상의 처를 국대부인으로 책봉하고, 그의 딸로서 미해공의 부인으로 삼았다.



처음 제상이 떠나갈 때 부인이 그 소식을 듣고 쫓아갔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망덕사 문의 남쪽 모래밭 위까지 와서는 거기에 누워 오래도록 목 놓아 울었다. 그로 인해 모래밭을 장사라고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부축하여 돌아오려 했으나 부인이 다리를 뻗고 일어서지 않으므로 그 땅 이름을 벌지지라 했다.



한참 뒤 부인이 사모하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을 하다가 죽었다. 그래서 치술신모가 되었는데 지금도(고려시대) 이곳에는 사당이 있다.



▲ 삼국유사 김제상조에 눌지왕의 동생 미해를 왜국에서 구해 신라로 돌려보내고 김제상은 왜국에서 처형당했다. 김제상의 부인이 딸과 동해를 보며 그리워하다가 죽어 돌이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울산 치술령의 망부석.
▲ 삼국유사 김제상조에 눌지왕의 동생 미해를 왜국에서 구해 신라로 돌려보내고 김제상은 왜국에서 처형당했다. 김제상의 부인이 딸과 동해를 보며 그리워하다가 죽어 돌이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울산 치술령의 망부석.
◆흔적

내물왕의 흔적은 경주 동부사적지에 능으로 남아 있다. 정확한 능의 위치는 파악되지 않고 있지만, 사적지로 지정하고 능을 관리하고 있다. 눌지왕의 흔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 울산광역시가 박제상 유적지를 기념물 제1호로 지정하고 유적지에 건립한 충렬공박제상기념관.
▲ 울산광역시가 박제상 유적지를 기념물 제1호로 지정하고 유적지에 건립한 충렬공박제상기념관.


울산광역시는 울산 도동면 만화리 산 30-2번지 일대 박(김)제상의 유적을 기념물 제1호로 지정하고, 충렬공 박제상기념관을 건립해 관리하고 있다. 울산은 치산서원, 망부석, 은을암을 박제상과 그의 부인에 대한 유적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 충렬공박제상기념관에 박(김)제상이 눌지왕의 동생 미해를 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가는 장면을 조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 충렬공박제상기념관에 박(김)제상이 눌지왕의 동생 미해를 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가는 장면을 조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치술령 신모설화: 박제상의 부인은 남편이 고구려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마침내 미사흔(미해)만 돌아오고 남편은 순절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숨을 거두었다.



몸은 망부석이 되고 넋은 치술조로 변하여 목도까지 날아가 남편의 넋을 맞아 신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 박제상기념관 앞에 박제상 삼모녀상이 있다.
▲ 박제상기념관 앞에 박제상 삼모녀상이 있다.


어느 날 왕이 있는 마루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아 구슬픈 소리로 지저귀며 ‘목도의 넋을 맞아 고국에 돌아오니 뉘라서 그것을 알리요’라는 뜻의 글자를 쪼아 놓고 날아가자 왕이 이상히 여겨 뒤쫓아 가 보게 하였던바 새는 치술암 기슭의 바위 속으로 들어갔다.



왕은 비로소 그 새가 박제상 부인의 넋임을 알고, 그 바위를 은을암이라 하고, 그 바위 위에 영신사를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 박(김)제상의 부인이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치술령 정상에서 왜국을 바라보다 죽어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
▲ 박(김)제상의 부인이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치술령 정상에서 왜국을 바라보다 죽어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


△망부석: 망부석은 치술령 정상, 동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이곳에 전망대를 만들어 바다를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망부석은 박제상의 부인과 딸의 모습으로 바다를 향해 서 있다.



▲ 울산 치술령 망부석 남쪽 4㎞ 지점에 박제상의 부인이 죽어 몸은 망부석이 되고, 혼은 새가 되어 숨었다는 바위 은을암.
▲ 울산 치술령 망부석 남쪽 4㎞ 지점에 박제상의 부인이 죽어 몸은 망부석이 되고, 혼은 새가 되어 숨었다는 바위 은을암.


△은을암: 은을암은 망부석의 남쪽 4㎞ 거리에 떨어져 있는 바위다. 은을암은 동해가 바라보이는 큰 바위에 성인이 서서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굴이 어둡게 입을 열고 있다. 박제상 부인의 혼이 새가 되어 숨은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굴에서는 사시사철 샘이 흘러내리고 있다. 은을암에는 지금도 사당을 지어 찾는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산 30-2번지에 박(김)제상 유적지에 건립된 ‘충렬공박제상기념관’에 설치된 신라시대 생활상.
▲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산 30-2번지에 박(김)제상 유적지에 건립된 ‘충렬공박제상기념관’에 설치된 신라시대 생활상.


△충렬공 박제상기념관: 울산시가 박제상과 그의 부인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사당의 터에 기념관을 세웠다. 기념관에는 박제상과 그의 부인에 관한 설화를 영상물과 그림, 조각 등으로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 치산서원에 박제상을 기리는 사당과 그의 부인, 두 딸을 기리는 3동의 사당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 치산서원에 박제상을 기리는 사당과 그의 부인, 두 딸을 기리는 3동의 사당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기념관 옆에는 박제상과 그의 부인, 두 딸을 기리기 위해 조선시대에 건립한 치산서원을 복원해 두고 있다. 서원 안에는 박제상을 모신 충렬묘, 부인을 모신 신모사, 두 딸을 모신 쌍정려 등 3동의 사당이 있다.



▲ 경주 남산과 낭산 사이 망덕사지 서쪽 강변에 박제상의 부인이 제상을 따라가다가 엎드려 울면서 친척들의 만류에 두 다리를 뻗쳐 일어나지 않아 들이름을 벌지지라 하고, 설화를 기념해 세운 벌지지 표지석.
▲ 경주 남산과 낭산 사이 망덕사지 서쪽 강변에 박제상의 부인이 제상을 따라가다가 엎드려 울면서 친척들의 만류에 두 다리를 뻗쳐 일어나지 않아 들이름을 벌지지라 하고, 설화를 기념해 세운 벌지지 표지석.


-벌지지: 경주 남산과 낭산을 잇는 넓은 들을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이 있고, 제방에 ‘장사 벌지지’(長沙 伐知旨)라는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뒷면에는 박제상의 부인이 남편을 그리워하며 모래밭에 두 다리를 뻗어 일어서지 않았다는 설화를 기록하고 있다. 동쪽에 보물로 지정된 망덕사지 당간지주가 우뚝 서 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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