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과 대결’의 늪에서 빠져나와야

홍덕률

대구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나라가 갈기갈기 쪼개져 있다. 온통 갈등이고 싸움이다. 그것도 보통 싸움이 아니다. 총만 안 들었지 마치 전쟁터 같다. 노사 간, 지역 간, 세대 간 불신은 이미 도를 넘었고, 최근에는 여당과 야당이 극한대결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어느 사회에서나 가치나 이해관계에 따라 다양한 집단들로 분화되고 그들이 서로 경쟁하며 갈등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문제는 그 갈등이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를 넘어 극한대결로 치닫는다는 데 있다.

갈등이 불신과 극한대결로 진전되는 이치는 간단하다. 집단들 사이에 몇 차례 관점과 이익의 차이를 경험하고 나면 만나서 대하는 것이 불편해진다. 이후 불신이 깊어지면 대화가 불가능한 집단처럼 갈라서게 된다. 그 과정에 우연한 오해가 작용할 수도 있고 누군가의 공작이 개입될 수도 있다. 그다음부터는 같은 집단이나 진영 안의 사람들끼리만 의기투합하며 박수치고 산다. 상대 진영은 대화의 상대가 아니라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남는 것은 극한대결이다.

물론 그 과정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몇 가지 계기들이 작용하면서 불행한 결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첫째는 집단간 갈등을 합리적으로 관리하는 제도와 메커니즘이 취약하다는 사실이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장치인 법과 공권력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랜 독재정권 하에서 법과 제도는 강자들 위주로 작동되었고 국민의 신뢰를 상실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이 대표적이다. 법과 제도가 불공정하다고 사람들이 믿는 순간, 사회 전반에 대한 불신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갈등의 제도적 관리도 어려워지고, 국가는 설 땅을 잃게 되는 것이다. 2천500년 전 공자도 이를 간파했다. 그는 병사와 식량과 신뢰 중에 으뜸은 신뢰라고 했다. 신뢰가 무너지면 국가는 설 수 없다고도 했다. 법과 공권력의 도덕적 권위와 신뢰를 세워내는 것이 너무도 중요하다.

둘째, 집단간 갈등을 중재하며 대화를 통해 해결하도록 이끄는 큰 지도자가 없는 것도 문제다. 사회가 둘로 쪼개져 있고 사람들이 대부분 두 진영 중 하나에 속해 있으면서, 자신 편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지도자로 인정하지도 않는다. 높은 안목의 큰 지도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천박한 문화도 크게 한몫 했다.

셋째, 상생과 공존의 문화도 취약하기 그지없다. 공동체의식과 문화도 상당 부분 붕괴되었다. 우리 모두의 대한민국은 없고 나의 대한민국, 내 진영의 대한민국들만 넘쳐난다. 그러니 우리 모두의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양보하고 타협하는 데는 관심없고, 싸워 이겨서 대한민국을 혼자 독차지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오랜 약육강식의 사회구조와 승자독식의 문화가 낳은 비극적 결과다.

넷째, 집단이나 진영 내의 지배층 논리도 따져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상대 진영까지 포괄하는 우리 사회 전체에 관심없는 것은 물론이고, 진영 내 구성원들의 복리에도 관심이 없다. 오로지 진영 내에서 누리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상대 진영에 대한 공격과 전투를 감행한다. 구성원들의 관심을 바깥 진영과의 싸움에로 돌리면 진영 내부의 문제와 모순도 은폐시킬 수 있다. 자신을 향한 진영 내의 도전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 진영의 구성원들을 결집시켜 내는 손쉬운 전략이기도 하다. 필요하다면 가짜뉴스도 만들어 뿌린다. 정치권에 싸움을 위한 싸움, 반대를 위한 반대가 횡행하는 것도 상당 부분 이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불신사회’와 ‘대결사회’의 결과는 너무 처참하다. 사회적 비용은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하다. 청년실업, 저출산 고령화, 미세먼지, 민생 등, 특정 진영의 과제가 아닌 국가적 과제들 앞에서도 손을 쓸 수 없게 된다. 한반도에 평화를 심는 일과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는 일 등, 정파적 과제일 수 없는 숙제들을 앞에 두고서도 속수무책이게 만든다.

속히 우리 사회를 불신과 극한대결의 늪에서 건져내야 한다. 여기서도 정치권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권에는 기대난망이다. 정치권의 구태에 생각없이 끌려 다니거나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는 이유다. 국민과 미래를 위해 일하는 상생의 정치로 바꿔내,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 있는 불신과 극한대결의 문화를 걷어내야 할 것이다. 역시 깨어있는 시민의 몫일 수밖에 없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