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발을 감행하는 결기

오철환

객원논설위원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J 토인비’는 우리나라의 효 사상, 경로사상, 가족제도를 인류의 보존해야 할 위대한 유산이라고 격찬했다. 그는 노년을 우리나라에서 보내고 싶다는 덕담을 하기도 했다. 효는 예로부터 광범위하게 신봉해온 우리 민간신앙이라 할 만했다. 존속 살해 등 가족 간 흉악 범죄가 빈발하여 효 사상을 전통사상이라고 거론하기조차 민망하긴 하다. 그렇지만 아직은 우리사회에서 효가 인륜의 근본이라 해도 큰 무리는 없다. 효 사상의 기원은 흔히 유교에서 찾는다. 그렇지만 ‘효녀지은설화’나 ‘손순매아설화’가 삼국유사 등에 전하는 걸 보면 우리 사회의 효 사상은 그 근원이 더 원초적일 뿐더러 자생적인 면모도 다분하다.

공자는 "효란 덕의 근본으로 가르침이 비롯되는 곳이다. 사람의 몸과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를 훼손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입신하여 도를 행하고 후세에 이름을 날림으로써 부모를 현창하는 것이 효의 마지막이다(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무릇 효는 부모를 섬기는 데서 시작하여 임금을 섬기는 과정을 거쳐 몸을 세우는 데서 끝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부모로부터 받은 몸을 함부로 훼손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는 우리 전통 사상의 뿌리다. 우리 민족이 오랜 세월 온갖 불편을 감수하며 상투를 틀고 망건을 썼던 유래다.

조선 말 개화파들은 근대화와 개혁의 일환으로 단발령을 단행했다. 위생적으로 불결하고 일할 때 불편하다는 이유였다. 많은 선비들이 “손발을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고 했고, 면암 최익현은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고 반발했다. 단발령에 항의하는 분노에 찬 목소리가 요원의 불길처럼 방방곡곡으로 번져갔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천인공노할 야만적 박해였다. 효를 숭상한 유교문화와 상투를 신주단지 모시듯 했던 풍습을 깡그리 무시하고, 근대화와 개혁이란 선의만 내세워 강압적으로 단칼에 상투를 잘라버리려 했던 것은 과유불급 우매한 실책이었다. 의병이 전국적으로 봉기하였다. 단발령을 주도한 김홍집 등은 피살되고 단발령은 결국 철회되었다.

현금 우리사회는 신체발부에 대한 유교적 시각을 구시대의 원시적 유물 정도로 치부한다. 불효라는 이유로 머리카락을 깍지 않겠다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그 흔적은 아직 우리 주변에 남아있다. 삭발이 그것이다. 삭발은 흔히 투쟁 수단으로 사용된다. 노동자들이 그들의 결연한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머리를 박박 미는 모습을 심심찮게 목격한다. 몸뚱아리 외엔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그들의 주장을 절실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많지 않다. 테러를 감행하거나 자해를 시도하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테러는 논외로 하고 자해의 경우만 보면, 자살, 할복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과 단지, 단식, 혈서, 삭발 등과 같은 온건한 방법이 있다. 삭발은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고유한 투쟁방법이고 신체발부에 대한 유교적 시각의 문화적 흔적이다. 삭발은 목을 자르는 절절한 심정으로 결행하는 지부복궐소의 현대판 버전이다. 자기의 주장을 들어달라는 절규이다. 강자들이 약자들의 목소리를 계속 귓등으로 흘려듣게 되면 더욱 강력한 선택지로 가는 빌미를 제공한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최근 선거법 등 패스트트랙 지정에 항의하여 다섯 명의 야당 의원들이 삭발을 감행하였다. 적지 않은 연세에 삭발을 감행하는 결기가 가슴에 와 닿는다. 불도저같이 밀어붙이는 여당에게 몸싸움과 자해 이외에는 뾰족한 투쟁방법을 찾지 못하는 야당이 안쓰럽다 못해 연민을 느낀다. 자해를 통해 상대방을 압박하고 상황의 절박함을 국민들에게 호소하겠다는 처절한 모습이 눈물겹다. 이를 두고 시대부적응자의 ‘죽기살기식’ 낡은 행태라거나 ‘보여주기식’ 찌질한 자기학대라며 비난하는 사람도 있는 듯하다. 이벤트성 퍼포먼스라 해도 좋다. 꼬랑지 내린 채 몸을 사리고 숨어있는 것보다 훨씬 낫다. 국민의 대표로서 나라를 위하여 국민을 대신하여 몸을 바쳐 희생하겠다는 자세는 적어도 긍정적으로 보고 싶다. 목을 자르는 절박한 심정으로 삭발한 분들께 경의를 표한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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