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적 소비의 기원은 설탕

박정호

KDI 전문연구원

푸아그라 요리를 위해 거위 목구멍까지 강제로 사료를 넣어 사육하고 있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푸아그라 불매운동이 전개됐다. 또 유기농으로 재배한 튤립은 비싸지만 많은 소비자들이 환경을 지키는 데 기여하기 위해 기꺼이 구매하고 있다. 이처럼 최근 들어 소비활동에 나름의 윤리의식을 투영하고자 하는 성향이 높아지고 있다.

인류 최초로 소비활동과 윤리적인 의식을 결부시킨 사례를 두고 많은 학자들은 설탕 소비를 인류 최초의 윤리적 소비형태의 기원으로 꼽고 있다.

인류는 좀처럼 단맛을 느끼기 어려웠다. 단맛을 낼 향신료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단맛의 거의 유일한 원천은 꿀이었고, 이로 인해 꿀은 오랫동안 희소한 사치품이었다. 하지만 갠지스강 델타와 아셈 지방 사이가 원산지인 사탕수수가 재배되기 시작하면서 인류는 단맛에 빠지기 시작했다.

초기 설탕은 왕족이나 귀족들만이 살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 중동, 인도, 중국 등지에서 교역을 통해 조달할 수 있는 양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신대륙을 발견한 유럽인들은 서인도제도의 섬들과 브라질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사탕수수 재배에 돌입했다.

영국의 소설가 디포가 1719년 쓴 로빈슨 크루소의 주인공 역시 브라질에서 플랜테이션 농업을 하던 농장주로 그려진다. 그가 배를 타고 항해를 했던 이유는 농원에서 일할 노예가 부족해 노예를 사 오기 위해 아프리카 기니로 가던 중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 것이다. 소설의 배경은 당시 유럽인들 사이에 신대륙에서 사탕수수 재배가 얼마나 일상화되었는지를 쉽게 가늠하게 해준다.

신대륙에서 다량의 설탕이 원활히 공급되면서 설탕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쓴맛이 강한 차나 초콜릿에 설탕을 넣어 마시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며 19세기 들어서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높은 열량을 얻을 수 있는 대표적인 수단으로 설탕이 대두되었다. 설탕이 뿌려진 비스킷, 캔디 등 고칼로리 음식들은 모두 저임금 노동자들의 열량을 보충하는 대안으로 고안되었다. 결국 19세기 말 설탕은 전체 칼로리 섭취의 14%를 차지한다. 이러한 과정을 역사가 시드니 미츠는 자신의 저서에서 1650년에는 설탕이 신기한 물건이었지만, 1750년에는 사치품으로 변하였고, 1850년에는 그야말로 모든 사람의 필수품이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설탕에 대한 수요가 보편화되면서 자연스럽게 사탕수수 재배 노예의 수탈 정도 또한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사탕수수로 설탕을 정재하는 과정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당시 설탕에 대해 ‘설탕 1파운드를 소비할 때마다 사람의 살 2온스를 먹는것과 같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노예에 대한 수탈 정도가 더욱 심각해지면서 이를 개선하기 위한 시도로 설탕 불매 운동이 전개되었다.

18세기 전반부터 퀘이커교도 등 종교집단들이 앞장서서 노예무역을 반대했다. 1786년에는 토머스 클라크슨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논문상을 받은 노예제와 인간매매론을 출간함으로써 노예제 폐지운동을 사회적인 이슈로 부각시키기도 했다. 1792년 영국 정부에 접수된 노예무역 반대 청원서만 519건이었다. 이처럼 노예문제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높아졌지만, 노예를 이용한 설탕 생산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것은 영국 의회 의원 대부분은 노예무역 내지 서인도제도 농장과 깊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1807년이 되어서야 영국의회에서는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하지만 이 역시 노예제 자체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며, 노예매매 자체를 금지하는 내용일 뿐이었다. 노예제 자체는 1833년이 되어서야 폐지된다.

최근에는 또 다른 이유로 설탕에 대한 불매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그것은 국민 건강 때문이다. 국민들의 설탕소비를 줄이기 위해 영국을 비롯해 핀란드, 프랑스, 벨기에, 노르웨이, 포르투갈 등 10여 개국이 설탕세를 도입했다. 멕시코, 칠레 등의 중남미와 피지 등 남태평양 국가, 그리고 태국, 필리핀 등 아시아 국가까지 약 30개 국가에서 시행 중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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