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없이 사랑하세요

발행일 2019-05-12 15:05:52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후회 없이 사랑하세요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알록달록 오색의 연등 행렬이 거리 곳곳을 수놓고 있다. 푸르른 오월 하늘 아래 붉디붉은 장미 넝쿨은 담장을 온통 뒤덮고 새하얀 아카시아는 달콤한 내음으로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물들인다. 더없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마음껏 사랑하기 좋은 시절,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좋게 생각하고픈 순간이다.

부처님 오신 날, 중생들은 몸을 정갈하게 하여 마음 수양에 무척이나 힘쓰는 듯하다. 조용한 산사를 찾아 템플스테이를 하는 지인은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체험해봐야 할 일이라면서 산사에서의 모습 사진을 찍어 보내면서 나에게도 동참할 것을 간곡히 권유한다. 새벽 예불에 동참해 마음의 때를 꼭 씻어보라고.

부처님 말씀이라는 글도 정성껏 첨부하였다. ‘깨달음이란 우리 인생에서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지 말아야 할 어떤 길을 갈 때도 있으며 혹은 하지 말아야 할 어떤 일을 할 때도 있다. 이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스스로의 깨달음이다. 마음이 곧 부처이며 법이기 때문에 이 마음을 깨달으면 어떤 고난 앞에도 굴복하지 않으며, 강한 신념을 가지고 어떤 일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있으니 더 좋은 말씀을 발견했단다. 입보리행론이 카톡으로 뜬다. ‘수천의 생을 반복한다 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아주 드물다. 그러니 지금 후회 없이 사랑하라. 사랑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세상 떠나신 남편의 은사님 편지가 떠오른다. 그분은 지난 모임 때만 하여도 폭탄주를 스무 잔 가까이 드시면서 건장하셨다. 맛있는 술을 어찌 아끼느냐고 제자들에게 권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얼마 전 갑자기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서 병실을 찾으니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계셨다. 그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다. 교수님은 정말 살면서 한 점 티끌도 남기지 않고 바르게 살고자 애쓰신 분이신 것을 가까운 이들은 다 아는 듯하다. 평생을 곧고 바른 자세로 사시느라 때로는 서운한 감정을 가지게 되는 분도 계셨을 터이다. 교수님은 임종 직전 조문객들을 위해 평소의 감정을 글로 적어 편지로 남기셨다. 갑자기 그분이 돌아가시자 유족은 고인의 평소 유지대로 부의금을 받지 않는 대신 장례식장에 조문 온 손님들에게 그 편지를 전달했다.

‘저를 너그럽고 다정히 대해주시며 아껴주신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 올립니다. 원망과 오해가 있으셨던 분들에게는 제가 너무 미숙했음을 고백합니다. 부디 잊어 주십시오. 여러분들께서는 좀 더 따뜻하게 사시다가 운명의 뜻에 따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별나고 거칠었던 저를 잘 감싸주셔서 큰 탈 없이 떠나게 되어 행복합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고인의 마지막 편지를 보며 청렴하고 소탈했던 그분의 모습을 다시 떠올린다. 의과대학 시절 교수님의 첫 수업 시간이 기억난다. 줄이 반듯하게 선 하얀 바지를 차려입으시고 꼿꼿한 자세로 들어오셔서 교단을 이리저리 다니시며 학생들을 훑으셨다. “여러분, 내 이름 잘 알고 있지? 나는 상당히 예민하다. 나는 예민해 교수다.”라고 소개하셔서 우리는 와~하하 웃음보가 터졌다. 지루하기 쉬운 수업 시간을 간간한 농담을 섞어 재미있고 쉽게 이끌어 주시던 교수님. 간혹 농담에도 웃지 않는 선 머슴애들이 있으면 호통을 치시곤 하였다. “야!, 웃어야 할 때는 웃고 울어야 할 때는 울 줄 아는 의사가 되어야지!” 심지어는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무표정한 제자는 문밖으로 쫓겨난 적도 있을 정도로 전설 같은 교수님, 학장을 하면서도 원리 원칙대로 청렴해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다. 편지 속의 너그러운 양해는 당신의 신념으로 인해 간혹 오해가 있었다면 그 부분에 대한 양해를 부탁하신 것 같다. 평소 선생님의 인품을 다시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그 편지는 나의 손에서 오랫동안 머물 것 같다. 교수님은 사람들을 좋아하시고 책을 좋아하시고 이야기하기를 무척 즐기셨다. 술은 누구 따를 자가 없을 정도로 애주가셨기에 교수님을 떠올리면 언제나 막걸리 한잔이 떠오를 것 같다. 예술적인 맛으로 고기를 구워주시던 교수님, 늘 그리울 듯하다. 울긋불긋 꽃 대궐을 이루는 5월의 향기 속에서 선생님의 빙긋이 웃으시는 그 모습이 눈에 내내 어린다. 사모님을 ‘소중이‘라고 부르며 애지중지 대하시더니 어찌 미련 없이 훨훨 떠나셨는지. 제자인 남편도 스승을 닮아가는 지 어느새 그의 휴대폰에는 나의 이름대신 ‘소중이’로 저장해 두었다고 한다. 스승님의 유언대로 남은 생을 후회 없이 사랑하며 살다가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 반갑게 인사드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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