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부형현대경제연구원 이사
▲ 이부형현대경제연구원 이사
어느 날 한 남자가 연인인 여자에게 당신을 사랑하니 자기와 결혼해달라며 청혼했다. 그러자 그녀는 굉장히 난처한 듯 ‘어떻게 하지. 나는 당신의 딱 절반만 사랑하는데. 내가 사랑하는 당신의 그 절반이라면 결혼할 수 있어요’라고 답했다. 이에 남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결혼할 건지 말 건지 결정하길 강요했고, 그녀는 또다시 ‘아무리 그래도 당신의 절반밖에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온전한 당신과 결혼할 수 있겠어요’라며 거절했다.

남자가 얼마나 황당해했을지도, 무리한 결정으로 딜레마에 빠지지 않으려는 그녀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난데없이 웬 뜬구름 잡는 이야기? 아니다. 요즘 우리사회에서 첨예하게 벌어지고 있는 소득주도성장의 토대에 관한 논란을 보면 흑과 백, 선과 악, 득과 실 등 이분법적인 사고에 근거해서 어느 한쪽을 무리하게 선택하려는 흑백사고의 오류(black-or-white fallacy)에 빠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어서 꺼낸 이야기다.

찬성하는 쪽은 우리 경제가 성장한 만큼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하고, 반대하는 쪽은 그것은 해석상 오류이고 오히려 분배를 위한 임금을 인위적으로 올리면 시장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고 맞서고 있다. 마치 헤어질 것처럼 결혼을 강요하는 듯한 남자와 그 남자의 절반만 사랑하기에 아니, 그 남자의 나머지 절반을 사랑하지 않기에 결혼할 수 없다는 그녀가 맞서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쪽 주장이 더 타당할까? 소득주도성장의 토대에 관한 최근 논란은 실질 GDP 성장률과 실질 임금 상승률 간의 격차 또는 노동소득분배율(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피용자보수 비중)의 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만약, 실질 GDP 성장률에 비례해 실질 임금이 상승하거나, 노동소득분배율이 상승하면 분배가 개선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논란의 내용을 살펴보면 서로 다른 기준으로 산출한 결과를 두고 공방을 주고받고 있어서 어느 쪽 주장이 더 타당한지 판가름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어느 쪽이든 비교의 기준이 되는 것은 GDP나 국민소득처럼 부가가치로 환산된 우리나라 전체의 생산성을 나타내는 지표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생산성과 분배가 큰 괴리 없는 상태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생산성 개선 없는 분배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나눠 줄 양이 일정 수준에서 정체될 경우, 분배는 단순히 더 많이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사이의 제로섬게임으로 변질되어 또 다른 문제로 비화할 것이 뻔하다.

더군다나 2050년이면 우리나라는 저출산 고령화로 전체 인구 중 경제활동인구가 50% 수준으로 떨어지고, 65세 이상 인구가 40% 정도로 확대될 전망이다. 만약, 이 전망이 앞으로도 바뀌지 않는다면 분배에 필요한 자원 규모는 급격히 팽창할 것이다. 생산성의 개선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분배할 자원은 턱없이 부족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엄청난 부작용을 감수하고서라도 윤전기를 막 돌리면 감당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바이다.

다행스럽게도 최근의 논란에서는 임금 상승 등에 따른 비용 상승, 고용 환경 개선 지연, 자영업 경영환경 악화 등 소득주도성장정책이 기대한 만큼의 결과를 아직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양측 모두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또, 중장기적으로는 혁신을 통해 경제 전반의 생산성을 높여 지속가능 분배를 위한 기반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도 서로 접점을 찾고 있는 것 같아 한시름 놓인다.

앞으로의 논의는 어떻게 생산성을 높여 나눠줄 파이를 키울 것인지, 또 이렇게 해서 커진 파이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분배할 것인지에 집중하면 좋겠다. 나아가 분배시스템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모니터링하고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보완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성장이 먼저냐 분배가 먼저냐가 아니라 성장과 분배가 동시에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딱 절반만 사랑하는 사람과 어떻게 결혼하겠는가.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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