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 권정생

발행일 2019-05-16 16:03:08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권정생

세상의 어머니는 모두가 그렇게 살다 가시는 걸까/ 한평생/ 기다리시며/ 외로우시며/ 안타깝게./ 배고프셨던 어머니/ 추우셨던 어머니/ 고되게 일만 하신 어머니/ (중략)/ 어머니는 누구랑 살까/ 이승에 있을 때/ 먼 나라로 먼저 갔다고/ 언제고 언제고 눈물지으시던/ 둘째 아들 목생이 형이랑 같이 살까/ 아침이면 무슨 밥 잡수실까/ (중략)/ 어머니 사시는 거기엔/ 전쟁이 없을까/ 무서운 포탄이 없을까/ 총칼을 든 군대들이 없을까/ 모든 걸 빼앗기만 하는 임금도 없을까/ 무서워서 하루도 한 시도/ 마음 못 놓는 날이 정말 없는 것일까/ 그래서 헤어지는 슬픔도 없는 것일까/ 정말 울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중략)/ 너무 많이 배고프지 않았으면/ 너무 많이 슬프지 않았으면/ 부자가 없어, 그래서 가난도 없었으면/ 사람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면/ 으르지도 않고 겁주지도 않고/ 목을 조르고 주리를 틀지 않았으면/ 소한테 코뚜레도 없고 멍에도 없고/ 쥐덫도 없고 작살도 없었으면/ (중략)/ 그리고 이담에 함께 만나/ 함께 만나 오래 오래 살았으면/ 어머니랑 함께 외갓집도 가고/ 남사당놀이에 함께 구경도 가고/ 어머니 함께 그 나라에서 오래 오래 살았으면/ 오래 오래 살았으면……

- 동시집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1988)

언젠가 수십 광년의 거리인 태양계 밖에서 지구와 환경이 비슷한 행성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그때, 나는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을 넘어 지구별에서 저 세상으로 떠난 사람들끼리 따로 한 살림 오붓하게 차려 살고 있진 않을까란 공상을 했다. 권정생 선생과 그 어머니의 이승에서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든 시를 읽으면서 내 공상도 활기를 띄어 내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도 이랬으면 하고 바랬다. 그곳에 전입신고 마치고 “아이고, 이제 왔나, 고생 많았지” “보고 싶었어요, 어머니” 외할머니도 뵙고, 순영이 누나도 만나고, 그리운 사람 모두와 인사를 나눈 뒤 이제는 자리 잡고 지낼 만 하신지. 이승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무늬로 오래오래 사시다가 훗날 우리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권정생 선생의 섬세한 애정이 구구절절 배어있어 이오덕 선생 말씀 마따나 '무조건 감동적'이다. 선생 자신도 12년 전 5월17일 ‘보리밥 먹어도 맛이 있고’ ‘나물 반찬 먹어도 배가 부른’ 그곳으로 떠나가서 ‘어머니랑 함께 외갓집도 가고’ ‘남사당놀이에 함께 구경도 가고’ 그러면서 오래오래 잘 살고 계실 것이다. 선생은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며 인류를 진정으로 사랑하신 이 시대의 성자셨다. 그리고 줘도 받지 않으실지 모르겠으나 누구보다 노벨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평화주의자셨다.

선생은 다시 태어난다면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 스물다섯 살쯤에 스물 두세 살의 처녀와 벌벌 떨지 않고 예쁜 사랑을 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그 나라’에서 오래오래 사시다가 행여 이 세상으로 다시 오신다면 꼭 그러시길 바란다. 내 어머니도 내 아버지보다 조금만 더 마음씨 착한 남자 만나서 하고 싶은 그림 그리며 속 하나도 안 썩이는 딸 아들 하나씩 다시 낳아 진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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