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아라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눈부신 오월의 하루가 열렸다. 따가운 태양으로 후끈 달아오르던 대지가 축복처럼 내리는 비에 젖는 항구 부산에서 향긋한 땅의 내음을 코끝으로 들이켠다. 역 마당에 피어난 이름 모를 하얀 꽃들이 다소곳한 자태로 비에 젖는다. 빨간 장미가 우거진 모퉁이를 돌아 기차역으로 들어선다. 정시에 떠나는 기차를 놓치지 않아야 늦지 않게 식장에 도착할 터인데 싶어 조바심이 난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오월, 친한 후배의 딸이 결혼하는 날이다. 세월은 얼마나 빠르게 날아가는지, 내가 오월의 신부가 된 지도 벌써 30여 년 전이니 말이다. 우연한 인연으로 친동기처럼 아끼는 사이가 된 후배, 그녀가 불룩한 배로 인턴이라며 내게 왔다. 아픈 아이를 돌보는 의사의 입장만 생각하던 철없던 선배는 그녀에게 어린이날 기념으로 장식할 풍선을 불게 했다. 만삭의 배로 심호흡을 많이 하고 몸을 많이 움직여야 순산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이론까지 들이대 가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린 지시에 그녀는 충실하게 따랐다. 잘 부풀어지지 않는 풍선을 빵빵하게 불어대느라 급기야 어지럼증까지 느껴 누워서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니 말이다. 그때 낳은 딸을 출가시키는 날이라니 어찌 안 가볼 수 있으랴. 이런저런 바쁜 일들을 모두 다 싹 밀쳐두고 고속열차에 몸을 실었다.

담장 넘어 넘실대는 꽃들이 내게 충고하는 것 같다. 무슨 일이든 미루지 말 것. 그때그때 고마운 것은 갚아가며 인생의 즐거움을 맛볼 것, 무엇보다 자주 웃을 것, 가까이 있는 소중한 이들에게 잘할 것….

천사 같은 얼굴의 두 사람이 혼인하려고 환한 얼굴로 서 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 하여 사랑하는 부부가 되어 효를 다하는 자녀가 되고 만인에게 존경받는 부모가 되어 행복한 가정 이루길 기원한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오월의 신부에게 온 세상의 축복을 다 빌어주고 싶다. 신부의 반짝이는 드레스를 보면서 음과 양의 조화를 표현한 유명 다기에서 보고 감동했던 그 순결하고 고결해 보이던 드레스를 떠올려본다. 이따금 찾아올지도 모를 슬픔과 미움의 감정들은 아예 막아주고 싶을 만큼.

나는 행복에 겨워하는 커플을 바라보면서 네 글자를 떠올린다. ‘미용고사’를.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언제나 이런 단어들을 스스럼없이 사용하면서 맑고 밝게 살아가기를 빌어주고 싶다. 우리의 모든 고통은 과거의 기억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지우개로 지우듯 나쁜 감정이나 기억을 깨끗이 없앨 수만 있다면 우리 마음의 고통은 눈 녹듯이 사라지지 않을까. 향기로운 오월, 결혼식장에서 식이 끝날 때까지 꼿꼿이 서서 지켜보며 나는 그들에게 ‘미용고사’를 마음으로 건넨다.

그리고 나를 소중이라고 부르는 이의 진심을 담은 결혼 30주년 기념 편지를 나지막이 읊조려본다. 오늘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하는 부부가 언제나 변함없이 하루하루 즐겁고 행복하게 살면서 해마다 오월이면 꺼내어 읽어보기를 희망하면서.

‘1주년 지혼식: 아직 초보자여 종이에 먹물도 마르지 않는 상태를 말하니 그저 좋기만 할거구먼./5주년 목혼식: 상대방을 보아도 나무토막 보는 것처럼 무감각하니, 어허! 나무가 잘 자라려면 물을 주어야지./10주년 석혼식: 결혼식 때 장만한 놋쇠 그릇에 녹이 났으니 합심하여 잘 닦아서 후일을 대비하게./20주년 도혼식: 투박한 질그릇이 오히려 더 친근하니 담긴 음식 맛도 좋아라. 깨져도 붙여 쓸 수 있지만, 금은 없어지지 아니하니 미연에 주의하게./25주년 은혼식: 하얗게 빛나는 은 쟁반에 서로의 얼굴을 비추니, 비친 얼굴에 풍상 세월 흔적은 남아도 거울 같은 은쟁반에 마음마저 비칠레라./30주년 진주혼식: 상처와 오점을 싸안고 진주 보석으로 승화시키니, 녹아든 이물질은 흔적조차 없고 아름다움만 그윽하네./50주년 금혼식: 반백 세월을 같이 하였으니 서로가 금과같이 귀한 사람이라, 금관은 못 씌워 줘도 멋진 금가락지 한 개씩은 장만해서 끼워 봄이 어떨지./60, 70주년 금강혼식: 날로 자라는 다이아몬드와 같아서 주위의 부러움을 한껏 받고도 고귀함에 고개 숙여지니, 존경과 찬사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어라.‘

기쁘고 행복하던 때, 또는 상대가 내 마음 같지 않아 화나고 슬프던 순간 등, 다양한 감정이 섞이더라도 이를 통해 조금씩 성장해 가는 것이 사랑이 아니겠는가. 풋풋하고 설렘 가득한 기억만을 건져 담아 언제나 상대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공감하고 서로 축복해주기를, 그런 바람으로 첫날밤에 하면 좋은 약속이라 여기는 ‘결혼기념일’ 글을 아름다운 부부에게 보내며 소망한다. “잘 살아라.~!”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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