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별이 뜨는구나 / 허정분

발행일 2019-05-26 15:31:06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아기별이 뜨는구나/ 허정분

무슨 소용이겠냐 애기야/ 네가 하늘나라 천사로 떠난 지 오늘로 49일이란다/ 보고 싶고 보고 싶어 시도 때도 없이 흘린 눈물/ 아직도 내 등에는 네가 업혀있는데/ 야속한 시간은 속절없구나/ 부질없어 넋 놓은 할미 대신 너의 외할머니/ 가엾은 어린 영혼 극락세계에 들라고/ 큰돈 내놓으시고 부처님 앞에서 사십구재를 모신다/ 봄꽃이 피었다 지고 지상에는 철쭉이 한창이다/ 너는 영원히 노란 민들레꽃처럼 웃는데/ 망자들 혼백 모신 절 마당에는 슬픔 같은 적막이/ 먼 먼 하늘나라 아기별을 배웅하는 상현달로 떠 있구나/ 몇 번이나 이 절로 너를 보러 오려나/ 이승의 관습이 망자에 대한/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는 예우라면/ 개미 한 마리 죽여 본 일 없는 우리 아기/ 어여쁜 천사로 하늘을 날겠구나/ 우리 집 지붕 위에 조그만 여린 별 하나 뜨겠구나/ 부디 좋은 곳으로 잘 가거라/ 사랑하는 애기야

- 시집『아기별과 할미꽃』 (학이사, 2019)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다. 청천벽력이 납덩이보다 무거워서 짓눌리고 짓눌려 몸을 가눌 수 없다. 주저앉아 하염없이 줄줄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둔다. 부모의 죽음은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라 했고, 자식을 앞세우는 것은 창자가 끊어지는 애달픔이라 했다. 낭떠러지 밑으로 끝없이 떨어지는 슬픔은 세상에서 가장 참혹하다는데, 손자식이라고 해서 그 감도가 다를 리 없다. 조손 사이는 엄밀히 따지면 형제지간과 동격인 2촌에 해당한다. 그러나 내리사랑이란 말도 있지만 할미 허정분과 손녀 유진은 1촌보다 더 각별한 특수 관계이다.

손녀 유진은 척추측만증이라는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들숨과 날숨이 거칠고 힘든 후두연화증까지 덤으로 달고나왔다. 자그마한 바비 인형처럼 태어난 아기, 눈망울은 사슴처럼 컸다. 커가면서 자연스레 낫기도 한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맞벌이 아들 내외의 형편상 아이들의 보육은 할미가 도맡았다. 출산휴가 두 달 만에 며느리는 직장으로 복귀했다. 나이 들며 여기저기 아픈 곳이 늘어나는 처지에 버겁기만 한 돌보미지만 두 손녀딸은 하늘이 주신 선물이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병원신세를 져야했지만 할미의 측은지심은 사랑의 농도를 더욱 짙게 했다. 가랑거리는 기침이 칵칵 숨이 막히는 위급한 상태로 바뀔 때도 죄없는 ‘저 어린생명을 지켜주소서’ 하느님, 부처님, 삼신할미, 조상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들께 간구했다. 그런 가운데 할미에게 충만한 기쁨을 선사해주는 것이 있었다. 바깥 놀이가 힘든 아이는 늘 집안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림그리기는 유진이가 가장 잘 하는 일면서 가장 좋아하는 일이기도 했다.

어린이집에서도 친구가 없던 아이, 잘 걷지 못해 외로운 아이가 세상의 풍경과 사람들, 동물, 꽃, 상상으로 꿈꾸는 모든 미래를 쓱싹쓱싹 그려냈다. 할미는 그 경이로운 그림을 혼자보기 아까워 핸드폰으로 찍어서 지인들께 보여주면 모두 천재라며 감탄했다. 잘 자라서 좋아하는 그림이라도 맘껏 그리며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건만. 결국 지구별에서 8년을 산 유진을 거두어갔고 할미는 넋을 잃은 채 1년을 보냈다. 꾸역꾸역 음식을 밀어 넣는 자신이 너무나 싫었다. 그러나 신은 시심에 활기를 불어넣어 아이의 그림과 함께 거듭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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