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일반

세상읽기…삶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삶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삶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다.” 도자기에 적힌 캘리그래피를 선물로 받았다. 그 글귀가 묘하게 가슴을 찌른다. 며칠째 맑은 날이 계속이라 시골집 옥상 방수 페인트 도색을 걱정하던 차 제부가 도와주겠다며 나섰다. 언제 방문하더라도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는 그가 이번에 들고 온 글귀가 바로 그것이었다. 바빠 잠시도 틈을 낼 수 없을 정도라고 하면서도 운동은 좋아하여 몰두하던 그였기에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차를 세우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가 집안 청소까지 깨끗하게 해두고서 방수 페인트를 준비하여 반쯤이나 칠해 좋은 것이 아닌가. 땀을 쏟으면서도 하나도 힘들지 않다는 그에게 시원한 음료를 권하려고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운동을 좋아하고 사람을 만나는 것을 즐기고 남을 도와주기를 무엇보다 좋아하는 그였기에 늘 그 부모가 그런 모습을 보면 얼마나 안쓰러워할까 마음 쓰이곤 하였다.

아직 계절은 봄에 속하는 5월이지만 폭염 경보가 울린 지도 며칠 되었다. 오늘도 35도 가까운 더위 속에서도 쉬지 않고 옥상 바닥에 방수 페인트를 희석 액에 섞어 바르고 있는 그에게 시원한 마실 것을 권한 뒤 “내려와서 좀 쉬었다 하세요.”라고 하며 소매를 끌었다, 그러자 그는 지금 햇살이 아주 좋은 때니 이때야말로 바르고 나면 바로 바짝 말라서 깨끗하게 방수가 된다며 마저 다 마무리하고 쉬겠다는 것이 아닌가. 몇 차례 권하여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우두커니 서서 일하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햇살아래 서 있는 것만으로도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현기증이 느껴져 시원한 그늘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한 참 지내 내려와 실내로 들어온 그가 시원한 마룻바닥에 앉으며 벌겋게 달아오른 목덜미에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한마디 던진다.

“저 배드민턴 그만 두었어요.“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찌된 영문일까. 그렇게도 좋아하던 운동이 아니던가. 어릴 적부터 밥 먹는 것보다 더 좋아하던 운동이었고 늘 새벽 같이 일어나 운동하러 나가는 그 순간이 가장 즐겁다고 하더니. 전국 대결로 한 급수씩 올라갈 때 마다 짜릿한 희열을 느낀다는 것이 바로 배드민턴이라고 하면서 자랑하던 그였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몇 해 전 배드민턴 경기 도중 상대의 공에 눈동자를 맞아 각막이 찢어진 적이 있다. 그 눈이 내내 말썽을 일으켰던가. 수술을 했다더니 최근에는 더욱 안 좋아졌던 모양이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전국대회를 석권할 실력을 쌓아 대결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 대회를 앞두고 눈앞에 날 파리 같은 물체들이 자꾸만 날아다닌다고 하였다. 안과 진료를 받아 보라고 하였더니 그 진료에서 심각한 진단을 받아 아주 엄중한 경고를 받았나 보다. 비문증이 심할 때 그만 두지 않으면 황반 변성이 올 지도 모르고, 또 망막에 출혈이 올지도 모르니 심한 운동은 지금 당장 그만 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더라는 것이 아닌가.

그의 말을 들으니 가슴이 찌릿해온다. 어찌 그 좋은 운동을 그만두고 무슨 낙으로 그 즐거움을 대신 할 수 있으랴. 어디서든 즐거움을 찾는 그였지만 그토록 좋아하던 운동을 그만두게 되다니 상실감이 얼마나 심할까.

하지만 제부는 쓸쓸함 대신 환한 얼굴로 웃는다, “지금은 덜 바쁘니 형님 댁 페인트도 주말에 해드릴 수 있고 얼마나 좋습니까? 괜찮아요. 이제는 도자기를 배우며 퇴근 후 여가 시간을 즐긴답니다.” 캘리그라피와 도자기 굽기가 또 새로운 영역이라며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한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이 들면서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은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더 채워지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욕심은 끝이 없고 욕심을 채우려다 보니 삶은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으로 빠져 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 도 있지 않은가. 마음을 비우고 내 인생을 만들어 나가기보단 주어진 삶을 즐기려 하면 한결 편안해 지는 것을 느낄 수 있고 또 마음의 여유도 생겨 일이 오히려 쉽게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는 그를 보며 그래도 마음을 추스릴 용기를 가진 그의 등을 두드려 주고 싶다. 결국 욕심은 스스로의 삶을 망가트릴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조금 놓아 버릴 수 있는 삶을, 비울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좋지 않겠는가. 결국 인생의 행복은 채우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데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루 하나씩 내려놓으며 맑은 마음으로 날마다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다. 늘 욕심 없는 마음으로 행복한 삶을 만들어 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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