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를 위한 기도 / 남진우

발행일 2019-06-03 15:55:54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남진우

이 밤/ 대지 밑 죽은 자들이 웅얼거리는 소리가/ 내 잠을 깨운다// 지하를 흐르는 검은 물줄기가/ 누워 있는 내 귓속으로 흘러들어와/ 몸 가득히 어두운 말을 풀어놓은 시각/ 죽은 자의 입에 물린 은전의 쓴맛이/ 목구멍을 타고 내 몸 곳곳에 번져나간다// (중략)// 나는 이 밤/ 그들의 말이 두근대는 심장을 지그시 누르고/ 어둠 저편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의 눈빛을/ 막막히 마주보고 있다

- 시집『죽은 자를 위한 기도』(문학과지성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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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어떻게 살든 누구나 마지막 결말은 죽음이다. 그리고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석가모니가 자식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살려달라는 한 어머니에게 말했다. “이 마을 집집마다 찾아가 사람이 죽어나간 적이 없는 집에서 공양을 얻어와 봐라. 그러면 아이를 살려줄 것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은 집안은 없으며 석가모니도 예수도 죽음만은 어쩌지 못했다. 장자는 죽음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두려울 것도 싫어할 것도 없다고 했지만 보통사람들에게 죽음은 가장 낯설고 두려운 과정임이 틀림없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왔다는 사람이 있긴 해도 누구도 죽어본 경험은 없으며 아무도 그 죽음을 진술해주지 못한다. 또한 죽음은 항상 미지의 공포이면서 때때로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한다. 호머의 일리아드에는 불사신인줄만 알았던 아킬레스의 영웅적인 인생이 나약한 트로이 왕자 파리스의 화살 한 방으로 막을 내린다. 장례식장에서 아킬레스의 시신이 화장을 위해 제단 위에 누워있고, 그의 양 눈에 황금색 주화 두 개가 놓여진다. 눈 위에 동전 두 개를 올려놓는 것은 옛 유대의 풍습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이승과 저승 사이에는 스틱스강이 흐르고, ‘카론’이라는 뱃사공이 죽은 영혼을 배에 태워 저승으로 보내준다고 했다. 이때 뱃삯으로 은화 한 닢을 받았는데, 망자의 입속에 넣는 풍습이 있었다. 그 ‘은전의 쓴맛이 목구멍을 타고 내 몸 곳곳에 번져나간다’ 옛날에는 누군가 죽으면 ‘별똥별 하나 내 이마에 금을 그으며 떨어진다’고 했다. 이빨이 빠지는 꿈을 꾸면 누군가 죽는다고도 했다. 그 누군가는 매우 가까운 사람을 의미한다. 나는 꿈에서가 아니라 3년 전 실제로 이빨 하나가 부러진 다음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나로서는 애통한 죽음이었으나 구순에 가셨으니 다른 사람들에겐 그냥 노환으로 인한 별세였을 것이다. 의학적으로도 ‘자연사’에 해당하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할 죽음이었다. 외부 원인이 아닌 병으로 죽거나 신체 내부 원인으로 인해 죽게 된 경우는 모두 자연사라 일컫는다. 심장마비로 사망할 경우도 자연사에 해당하며, 그런 돌연사도 병원에서는 그저 자연스런 죽임일 뿐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사고나 자살, 살인 등으로 죽은 사람은 ‘외인사’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외인사는 안타깝고 참담하고 원통한 죽음들이다.

머나먼 이국의 강물 위에서 한순간에 변을 당한 이들의 죽음이라니. 베트남전쟁 이후로 우리 국민이 한꺼번에 남의 나라에서 외인사를 당한 사례가 또 있었을까. 언제 어디서라도 내게 덮칠 수 있는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죽음이 호시탐탐 내 손을 잡으려 들거나 어깨를 툭 치거나 옷깃을 스치며 지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은 ‘누군가의 눈빛을 막막히 마주보면서 다만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올리며 명복을 빌 뿐, 내 두려움은 회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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