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위한 묵상기도/ 고정희

어둠이 가득한 세상 속으로/ 악령이 깃을 치는 땅으로/ 첫 열 두 제자를 파송하던 날의/ 그리스도 마음을 묵상합니다// 평화를 전하러 가는 너희는/ 돈주머니를 지니지 말며/ 평화를 전하러 가는 너희는/ 양식자루를 지니지 말며/ 평화를 전하러 가는 너희는/ 여벌 신발도 지니지 말아라, 분부하신 그 말씀/ 내 오늘 깨닫습니다/ 그것이 평화의 길인 줄/ (중략)/ 평화를 추수하러 가는 너희는/ 내 평화를 외면하는 땅에서 묻은/ 신발의 먼지도 다 털어 버려라, 당부하신 그 말씀/ 내 오늘 깨닫습니다/ 그것이 평화의 삶인 줄/ (중략)/ 진실로 통일을 원하거든/ 너만의 돈주머니를 챙기지 말며/ 진실로 평화통일을 원하거든/ 너만의 천국을 꿈꾸지 말아라, 이르시는 그 말씀/ 내 오늘 깨닫습니다/ 이것이 평화의 부름인 줄



― 유고시집『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창비,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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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의 딸’ ‘광주의 언니’ 고정희 시인이 세상 떠난 지 28년이다. 1991년 6월 9일 지리산 등반도중 피아골의 급류에 휩싸여 43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녀는 시인이기에 앞서 민주투사이고 여성운동가이며 평화전도사였다. 전라도의 질펀한 황토 흙에 6·10민주항쟁, 5·18광주민주화운동 같은 역사의 물줄기를 내었고 사랑, 눈물, 그리움 같은 삶의 감동도 담아냈다. 그의 지성은 곧 전라도의 자부심으로 훼손됨이 없이 대물림하고 있다. 오늘날 광장에서 SNS에서 양심을 외면하지 않는 수많은 여성들의 가슴을 깨어있게 한 원천이 그의 언어였다.

그의 시 구절마다에는 힘을 솟구치게 한 감동의 움직씨가 배어있었다. 그의 시에는 시와 삶이 일치하는 구도자적인 삶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네가 그리우면’ 울고 있을 고정희 시혼의 힘은 오늘도 그것을 힘껏 떠받치고 있으며, 상처 입은 영혼들에게 크나큰 위로가 되고 있다. 정치인들에게도 때로 고정희의 시는 용기와 위안을 가져다준다. 2015년 12월 6일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페이스북에 ‘상한 영혼을 위하여’를 올린 바 있다. 안철수 의원 등이 그를 흔들어대며 당을 떠나기 바로 직전 상황이었다.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디든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는 구절에서 당을 흔드는 세력에 대해 정면 돌파의 결기가 담겼음을 쉽사리 유추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방점은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란 시구에 찍혀있었다. 고통을 수용하고 난관에 맞서면서 한편으론 희망을 내다보는 결연한 의지가 문재인의 정치적 함의였음을 그때뿐 아니라 지금의 정치상황에서도 느낄 수 있다.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새순의 희망과 존재의 풍요로움이 감지된다.

충분히 흔들리면서 단단해지고, 그 가운데서 유연함을 일깨워 물이 고이고 ‘꽃’을 피우리라 믿는다. ‘입으로는 평화를 원하면서 마음엔 두 주인을 섬기’는 자들의 집요한 훼방에도 굴하지 않고 한반도 ‘평화의 길’은 반드시 열리리라. “남의 발을 씻겨주고, 원수를 사랑하며, 땅에서 가난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묵묵히 이 땅에서 수행할 자 누구인가. 32년 전 6월10일 민주항쟁의 열기 가득했던 그때처럼 ‘평화의 부름’이 한반도에 가득하거늘, 지금은 세 번 네 번이라도 더 그 문을 두드려야할 때가 아닌가.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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