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 곽재구

아이슬랜드에 가면/ 일주일에 한 번/ TV가 나오지 않는 날 있단다/ 매주 목요일에는/ 국민들이 독서와 음악과/ 야외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국영 TV가 앞장을 서/ 세심한 문화 정책을 편단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돌아와 앉은/ 우리나라 TV에는/ 이제 갓 열여덟 소녀 가수가/ 선정적 율동으로 오늘밤을 노래하는데/ 스포츠 강국 선발 중진국 포스트모더니즘/ 끝없이 황홀하게 이어지는데/ 재벌 2세와 유학 나온 패션 디자이너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말 연속극에 넋 팔고 있으면/ 아아 언젠가 우리는/ 깡통이 될지도 몰라/ (중략)/ 살아야 할 시간들 아직 멀리 남았는데/ 밤하늘 별들 아름답게 빛나는데.

- 시집『서울 세노야』(문학과지성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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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아이슬란드는 30년 전만해도 국영TV채널 하나뿐이었고, 목요일은 방송이 없는 나라였다. 하지만 지금은 방송사도 3개로 늘어나 목요일 개점휴업은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이 시의 발표 무렵인 1990년에 이미 그 사정이 바뀐 셈인데, 시인은 그 나라의 ‘세심한 문화정책’을 부럽게 생각하면서 우리의 TV문화를 비판하고 있다. 물론 예외는 있지만 드라마의 수준도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진 않다. TV는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 모두 많은 진화를 해왔으나 아직도 바보상자니 깡통이니 하는 소리를 들으며 고약한 물건 취급을 받곤 한다.

고밀도직접회로의 집합이자 20세기 인류가 만들어낸 위대한 전파수신기를 우리는 왜 ‘깡통’이라고 불렀을까? 제공하는 일방적 정보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속성 때문에 사람들의 획일적 사고를 조장한다는 게 그 이유다. 신문이나 라디오와 달리 음향과 영상을 동시에 표현하는 지나친 친절로 인해 시각적인 상상력을 배제시켜 뇌의 작동을 멈춰있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일축하고 치부해버리기엔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크고 막강하다. TV는 언제나 가장 많은 여가시간을 우리와 함께한 쾌락의 정원이다.

사람들은 자극적인 것에서 쾌락을 느끼고 쉬운 것에서 그 자극적인 것을 찾는다. 텔레비전은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이러한 특성을 이용한다. 관능적이고 향락적인 장면을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자극적으로 표현한다. 빠르게 변하는 이러한 장면들은 사람의 뇌파를 자극하여 집중력을 잃게 한다. 막장 드라마라며 눈을 흘기면서도 빠져드는 이유다. 아예 다른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아 곧잘 수면상태와 다름없는 ‘아무 생각 없는 상태’로 작업 당하기도 한다.

그런데 보지 않으면 따분하고 쳐다보고 있으면 잠이 오는 이 ‘깡통’이 최근 큰일을 해주었다. 어제 새벽 쫄깃한 승리를 거머쥐며 전인미답의 축구역사를 써내려가게 된 것이다. 옛날 동네 축구할 때 보면 몸이 좀 느리고 자질이 부족한 친구의 포지션은 늘 골키퍼였으나 그 생각이 얼마나 무지막지한지를 단번에 전복시킨 경기였다.

축구는 우리 편을 응원하게 하는 사회통합적인 기능을 갖는다. 국제경기에서 우리 선수가 이기길 바라고 응원하는 까닭은 국가주의 기능을 띠고 있기 때문임을 부인하지 못한다. 스포츠와 내셔널리즘의 결합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고양시키기도 한다. 좌와 우, 빈과 부, 노소와 지역도 없다. 이때의 ‘깡통’은 ‘밤하늘 별들 아름답게 빛나는’ 꿈의 상자가 되기도 한다.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할 꿈이 있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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