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 김기택

발행일 2019-06-13 14:40:55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소나무/ 김기택

솔잎도 처음에는 널따란 잎이었을 터./ 뾰족해지고 단단해져버린 지금의 모양은/ 잎을 여러 갈래로 가늘게 찢은 추위가 지나갔던 자국,/ 파충류의 냉혈이 흘러갔던 핏줄자국.// 추위에 빳빳하게 발기되었던 솔잎들/ 아무리 더워져도 늘어지는 법 없다/ 혀처럼 길게 늘어진 넓적한 여름 바람이/ 무수히 솔잎에 찔리고 긁혀 짙푸르러지고 서늘해진다.// 지금도 쩍쩍 갈라 터지는 껍질의 비늘을 움직이며/ 구불텅구불텅 허공으로 올라가고 있는 늙은 소나무/ 그 아래 어둡고 탄 땅 속에서/ 우글우글 뒤엉켜 기어가고 있는 수많은 뿌리들.// 갈라 터진 두꺼운 껍질 사이로는/ 투명하고 차가운 피, 송진이 흘러나와 있다/ 골 깊은 갈비뼈가 다 드러나도록 고행하는 고승의/ 몸 안에서 굳어져버린 정액처럼 단단하다.

- 시집 『소』 (문학과지성사, 2005)

아는 사람에게서 솔잎으로 담근 술 한 병을 선물로 받았다. 예로부터 솔잎은 뇌졸중과 고혈압에 탁월한 약재로 쓰인다고 했다. 또 솔잎을 장기간 생식하면 늙지 않고 원기가 솟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고개를 계속 끄덕이다보면 동맥경화와 암도 예방하면서 노화도 방지하는 무병장수약이라는 말까지 나올 분위기였다. 사실 솔잎은 소나무의 축소판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성분은 거의 다 들어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솔잎이 처음엔 널따란 활엽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지리적으로 북반구에 분포하기 때문에 혹독한 추위를 견디기 위해 뾰족해졌고 잎과 종자에 다량의 고도불포화지방산이 함유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전에도 들은 바 있다.

우리 민족은 평생 소나무와 더불어 살았다.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태어나서 소나무를 땔감으로 추위를 피하고, 소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다녔다. 송홧가루로 만든 다식과 솔잎을 넣어 찐 송편을 먹고, 소나무 관에 들어가 자연으로 돌아갔다. 산에서 만나는 ‘구불텅구불텅 허공으로 올라가고 있는 늙은 소나무’의 ‘철갑을 두른 듯’ 두꺼운 껍질과 빳빳한 솔잎 하나도 예사롭지 않다. 인디언들도 이 세상 모든 존재와 생명 심지어는 무생물의 자연까지 신성한 그 무엇이 있다고 믿으며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150년 전 인디언 추장 ‘두발로 선 곰’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자연 속에서 배우는 것뿐이며 그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다”고 말했다.

인간의 마음이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면 완고해지고 삭막해지며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잃으면 자연 속에 살아있는 것들 또한 인간에 대한 존경심을 잃게 되며 결국은 인간으로부터 등을 돌린다고 믿는다. 대지는 모든 존재의 어머니며 그들 삶의 근거이자 나서 돌아가야 하는 곳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쩍쩍 갈라 터지는 껍질의 비늘’과 소나무 등걸과 ‘그 아래 어둡고 탄 땅 속에서 우글우글 뒤엉켜 기어가고 있는 수많은 뿌리들’과 ‘투명하고 차가운 피, 송진’과 뾰족한 솔잎 마다에도 각기 다른 설법이 담겨있음을 믿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가 아닐까. ‘고행하는 고승의 몸 안에서 굳어져버린 정액처럼 단단’한 말씀이 녹아든 저 솔잎술 한 병.

어디 늙고 구불텅한 소나무만이고 솔잎으로 담근 술뿐이겠는가. 돌짬 속에 핀 엉겅퀴 한 송이에도, 쓰러진 촌집 뒷간의 토담을 타고 오르는 호박넝쿨에서도 귀한 말씀의 엑기스는 깃들어 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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