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경주 노곡산방

18세기 프랑스 파리의 카페는 시민들의 사랑방이었다. 낮에는 커피를 마시고, 밤에는 와인을 마셨다. 볼테르와 루소 등 철학자들도 계몽주의 사상을 설파했다.

이런 자리에 생명력과 상상력을 키운 것은 와인이었다. 혹자들은 이것이 프랑스혁명으로 이어졌다고도 한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은 와인으로부터 시작됐다”는 말도 있다.

대부분의 과일로 와인을 만들 수 있지만, 역시 명품 와인은 포도를 가장 선호한다. 당도가 높고, 자체 효모를 갖고 있어 스스로 발효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최근엔 와인을 만들 수 있는 과일의 종류가 더욱 다양해졌다. 이 중 경주에서 체리로 와인을 만드는 강소농이 있다.

경주시 감포읍에서 ‘노곡산방’을 운영하는 김영도(67)대표와 아내 노혜순(66)씨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 부부는 경북도농업기술원에서 개발한 와인제조기술과 경주 특산물인 체리를 결합해 체리와인의 상품화에 성공했다. 체리는 경주에서 생산되는 대표적인 과일이다.

김대표는 1천여 ㎡의 조그마한 체리 과수원을 운영하면서 체리와인을 만들고, 체험농장을 통해 연간 3천여만 원의 소득을 올린다.

아직까지는 소득이 그리 높지 않은 편이지만, 체리와인의 독특한 맛과 희소성이 입소문을 타면서 새로운 농가소득원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인다.

◆노곡산방의 잡학박사

김대표는 토목시공기술사 자격을 소지한 고급기술 인력이다. 요르단의 화력발전소 건설현장에도 참여할 정도로 국내외 대형 공사장의 시공과 감리를 주로 담당했다. 특히 비행장 건설에 많이 참여했다.

재주도 많다. 와인소믈리에 자격은 물론, 문화해설사와 바리스타 자격증도 있다. 옻칠공예와 옹기제조, 한옥시공, 사진촬영, 천연염색, 스토리텔링 등 못하는 분야가 없을 정도다. 잡학박사, 멀티 플레이어, 만능 엔터테이너다.

이같은 다양한 분야의 자격증과 기술 습득은 1990년 귀농을 결심한 후, 경주에 터를 잡으면서 익힌 재주들이다. 귀농을 하면 이런 자잘한 기술이 많이 쓰여질 것으로 미리 예상하고 대비해 둔 덕분이다.

김대표의 발을 경주에 묶은 것은 경주의 문화재다. 서울에서 답사 차 들린 감은사지의 동탑과 서탑의 아름다움에 반해 아예 경주에서 살기로 결심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탑도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감포에 터를 잡았습니다.”

당장 동네다방에 들러 “살 땅을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노곡산방’의 주인이 됐다. 그게 벌써 귀농 19년차의 중견 농부가 됐다. 초창기에는 농사와 직장일을 함께 했으나 이제는 완전한 농부로 변신했다. 교사 출신인 아내는 커피 바리스타 자격을 가지고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

◆체리재배 최적지 경주

경주는 우리나라 체리의 최대 집산지다. 경주지역 100여 호의 농가에서 58ha의 체리를 재배한다. 전국 생산량의 36%를 차지하고 있다.

체리 재배의 역사도 100여 년으로 길어 기술력도 높다. 일제 강점기 처음 보급된 체리의 역사는 이보다 훨씬 거슬러 신라시대까지 올라간다.

그동안 자치단체와 재배농가를 중심으로 체리의 품질향상을 위하여 다양한 노력을 한 것이 전국 최고의 체리 집산지로 만들었다. 경주체리는 ’지리적 표시 단체표장등록‘도 마쳤다.

◆체리와인 제조

체리로는 와인을 만들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핵과류로 와인을 만들려면 씨(핵)를 제거해야 함으로 노동력이 많이 든다.

껍질이 너무 얇아 발효가 어렵고, 과즙이 40% 정도 밖에 나오지 않아 생산량도 작다. 당연히 채산성이 떨어져 지역 특산상품으로 개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체리와인은 1주일 간의 저온발효를 거쳐서 거름작업으로 찌꺼기를 제거하고, 4~5회의 여과과정과 숙성, 2차 발효과정을 거쳐 일년 후에 병에 담아 상품화 한다. 제조 공정이 까다롭다.

김대표는 씨 분리기를 도입해 노동력을 크게 줄였고, 경북도농업기술원이 개발한 체리와인 제조기술을 이전받고, 자신만의 노하우를 가미해 와인제조 기술을 완전 정립했다.

◆사람을 키우는 농사

김대표가 노곡산방에서 하는 중요한 일중의 하나가 사람을 키우는 일이다. 경주의 젊은농부들을 지도한다.

어느 날 젊은 농부 9명이 가르침을 받겠다고 찾아왔다. 청년들은 3년 동안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았다. 농사기술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쳤다.

처음 시작한 것이 자신을 소개하는 ‘3분 스피치’를 훈련 시켰다. 자기소개와 앞으로의 계획을 동료들 앞에서 발표하는 과정이다. 모두가 3분이 3시간 만큼 길게 느껴질 정도로 어려워했다.

다음 단계에서는 ‘나의 농사’라는 제목으로 PPT를 직접 만들고 발표하는 교육이었다. 발표를 마치면 8명의 동료들이 반드시 10개의 질문을 하고 답변을 하는 고난도의 교육이었다.

발표는 고사하고 80개의 질문에 답변을 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과정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청년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미래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는 농부로 성장해 갔다.

이들은 경북도에서 시행한 청년창업 오디션에서 ‘김교각 스님의 차’를 소재로 한 사업계획을 발표해 2억 원의 사업비를 지원받는 성과도 올렸다.

◆열린공간 노곡산방

노곡산방은 열린공간이다. 마을 주민은 물론 방문객의 사랑방이다. 농사에서부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까지 다양한 소재로 대화를 나눈다.

산방은 산촌의 작은 집이란 말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있다. 누구나 이용하는 공간이지만, 정치와 종교이야기는 하지 않고 숙식을 제공한다.

또 하나 특별한 원칙은 ‘주인은 듣기만 한다’는 것이다. ‘경청’하는 의미와 함께 손님이 주인처럼 자유롭게 이용한다는 의미도 있다. 주민들과 함께 마을의 크고 작은 행사를 의논하고, 농사정보를 교환하는 장소로 운영돼 언제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별한 축제

노곡산방에서는 봄.가을에 특별한 축제가 열린다. 지역 농산물을 주제로 도시 소비자를 초청하는 팜파티다.

봄에는 산나물, 가을에는 호박을 주제로 한다. 두릅과 취나물, 고사리등 이슬을 먹고 자란 산나물과 호박, 그리고 주민들이 주인공이다.

팜파티 참석자들은 반드시 현금 3만 원을 가지고 오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 돈으로 주민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사가지고 가라는 뜻이다.

집집마다 보자기 색깔을 정해서 판매한다. 2016년 4월에 열린 팜파티에서는 7분 만에 완판을 하는 기록도 세웠다. 3만 원이면 양손에 농산물이 가득하다.

팜파티에서는 주민들이 마이크를 잡고 마을이야기와 자기 농산물을 소개한다. 평생 대중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었던 주민들은 자신이 주인이라는 자부심을 느낀다.

이런 장면은 사진으로 촬영해 액자로 제작해 집집마다 걸어준다. 평생 농사일만 해온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자랑거리가 생겼다면서 즐거워한다. 이렇듯 노곡산방의 팜파티는 모두가 함께하는 특별한 축제다.

◆지역민과 함께하는 귀농

귀농인들이 겪는 어려움 중의 하나는 ‘지역 주민과의 융화’다. 도시의 개인주의적 문화와 농촌의 공동체문화가 상충되기 때문이다.

김대표도 그런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은 서로 일체감을 느낄 정도로 가깝고, 아끼는 관계로 발전했다. 이런 관계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울산에서 선생님을 하다가 퇴직한 아내의 공이 크다.

아내 노혜순씨는 마을의 농산물을 도시 소비자들에게 판매하는 중간 연락책이다. 오랜 학교생활에서 맺은 동료와 제자, 교회 교우들로 구성된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농산물을 판매해 준다.

물론 판매수수료를 받지 않는 자원봉사다. 어떤 때는 소비자들이 주문하는 농산물을 집집마다 배정해서 모으기도 한다. 지난해에는 쑥을 구해 달라는 요청이 많아 주민들이 단체로 쑥을 뜯으러 나서기도 했다.

마을 주민들과는 월 1회 함께 식사를 하고 소통의 시간을 갖는 것도 주민들과 함께하는 방법이다.

◆ 앞으로의 계획

최근 김대표가 고민하는 문제는 농촌의 고령화다. 대부분이 70대를 넘어선 초고령사회다. 고령화에 따라 매년 영농규모도 축소된다. 이것은 곧 소득 감소와 빈곤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김대표는 농산물 가공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가공을 통해 농산물의 부가가치를 높여 주민들의 소득을 보전하기 위한 방책이다.

장아찌나 된장, 고추장, 산나물 등 1차적인 가공품은 대부분이 한번쯤은 만들어본 경험을 가지고 있고, 도시 소비자들에게 어머니의 손맛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급속하게 진행되는 고령화시대에 대비해 부드러운 식감의 시니어식품을 개발하는 사업도 계획 중이다. 이런 사업계획은 김대표 혼자만의 사업이 아니라, 마을 전체 주민들이 참여하는 공동사업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부부는 농산물가공과 발효에 대한 공부를 하고, 다시 주민들에게 전달교육을 하고 있다.



글·사진 홍상철 대구일보 객원편집위원

경북도농업기술원 강소농 민간전문위원



이홍섭 기자 hslee@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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