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도화녀와 비형랑||진흥왕의 둘째 사륜이 신라 25대 진지왕으로 등극, 문란하고 음

삼국유사의 내용은 설화, 신화로 구성된 부분이 많다. 특히 도화녀와 비형랑조는 죽은 왕이 살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도깨비가 사람처럼 행동하며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신화적인 요소가 강한 부분이다.



진흥왕이 576년 8월에 사망하자, 거칠부를 비롯한 진골 귀족들이 왕의 둘째 아들인 사륜을 신라 25대 진지왕으로 추대했다. 진지왕은 진흥왕 말기에 국정 운영에 깊숙이 개입해 나라의 일을 맡아하는 경험을 쌓았다.



▲ 삼국유사 기행단이 무열왕릉 뒤편의 추정 진지왕릉을 답사하고 있다.
▲ 삼국유사 기행단이 무열왕릉 뒤편의 추정 진지왕릉을 답사하고 있다.


진지왕은 즉위하면서 거칠부를 상대등에 임명해 나라일은 실질적으로 거칠부가 장악했다. 그러나 거칠부가 사망하면서 진지왕을 지지하던 세력이 무너지고, 진지왕이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정치가 극도로 문란하게 됐다.



이에 진흥왕의 측근이었던 귀족세력들이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진지왕 형의 아들이자 진흥왕의 손자인 백정을 신라 제26대 진평왕으로 옹립했다.



진지왕의 등극과 폐위 과정에는 권력을 두고 이루어지는 숱한 갈등의 모습들이 그대로 노출된다. 신라시대 중기의 왕권을 둘러싼 세력 다툼과 권력 구도를 짐작하게 한다.



◆삼국유사: 도화녀와 비형랑

제25대 사륜왕의 시호는 진지대왕으로 성은 김씨이며, 왕비는 기오공의 딸인 지도부인이다. 태건 8년 병신(576) -고본에는 11년 기해(579)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왕위에 올라 4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나, 정치가 어려워지고 음란하여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



이에 앞서 사량부 백성의 딸이 있었는데 자색이 곱고 아름다워 당시의 사람들이 도화랑이라 불렀다. 왕이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욕보이고자 하니, 그 여인이 말하기를 “여인으로서 지켜야할 바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것이거늘, 지아비가 있는 몸으로 어찌 다른 데로 가오리까? 비록 천자의 위엄으로도 끝내 절조를 빼앗지 못할 것이옵니다” 라 고 했다.



왕이 “너를 죽인다면 어찌하겠느냐?” 하니, 여인이 “차라리 시장거리에서 목을 베일지라도 다른 마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라 했다. 왕이 “남편이 없으면 몸을 허락할 수 있겠는가?”라 물으니 “허락할 수 있습니다”라 했다. 왕이 그녀를 보내주었다.



이 해에 왕이 임금자리에서 쫓겨나서 죽었다. 그후 2년 만에 도화녀의 남편도 또한 죽으니, 죽은 지 열흘 되는 밤중에 홀연히 왕이 옛날의 평상시와 같이 여인의 방에 들어와 “네가 예전에 허락을 하였고, 지금은 너의 남편이 없으니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라 하자, 그녀는 가벼이 허락하지 않고 부모에게 여쭈어 보았다.



부모가 “임금님의 말씀인데 어떻게 어기겠느냐?” 하고 딸을 왕의 방으로 들어가게 했다. 왕이 머무른 7일 동안 항상 5색 구름이 집을 덮고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더니 7일 후에 홀연히 왕의 자취가 없어졌다.



여인이 이로 인해 태기가 있다가 달이 차서 해산을 하는데, 천지가 진동하면서 사내아이 하나가 태어났으니 이름을 ‘비형’이라 했다.



▲ 진지왕과 도화녀의 아들 비형랑의 놀이를 모방해 제작된 비형랑 공연.
▲ 진지왕과 도화녀의 아들 비형랑의 놀이를 모방해 제작된 비형랑 공연.


진평대왕이 매우 기이한 소문을 듣고 궁중에 데려다 길렀다. 나이 15세가 되자 집사라는 벼슬을 주었더니, 그는 밤마다 멀리 도망나가 놀았다.



왕이 용맹스런 군사 50인을 시켜서 지키게 했으나, 매번 월성을 날아 넘어 서쪽 황천의 강변에 가서 귀신들을 데리고 놀았다. 군사들이 숲 속에서 엎드려 엿보았더니 귀신들은 여러 절에서 새벽종소리가 들리면 제각기 흩어지고 비형랑도 또한 돌아가는 것이었다.



군사들이 돌아와서 이 사실을 보고 드리니 왕이 비형을 불러 “너는 귀신들을 거느리고 논다고 하는데 정말이냐?”라고 묻자, 비형랑이 “그러하옵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너는 귀신들을 시켜 신원사 북쪽 개울에 다리를 놓도록 하여라”고 했다. 비형이 왕명을 받들어 그의 무리들을 시켜 돌을 다듬어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완성했다.



그래서 다리 이름을 ‘귀교’라 했다. 왕이 또 “귀신들 가운데 인간 세상에 나와서 나라의 정치를 도울만한 자가 있는가?”라 하자, “길달이란 자가 있사온데, 가히 나라의 정치를 도울만합니다”라 했다.



왕이 함께 오라 하여 그 다음 날 비형과 같이 뵈었다. 그에게 집사 벼슬을 주었더니, 과연 그는 충성스럽고 정직하기가 짝이 없었다.



이때 각간 임종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이 명하여 길달을 아들로 삼게 하자, 임종이 길달에게 명하여 흥륜사 남쪽에 다락문을 세우게 하고, 매일 밤 그 문 위에 가서 자도록 했다. 그래서 그 문 이름을 ‘길달문’이라 했다.



하루는 길달이 여우로 변해서 도망가자 비형이 귀신을 시켜 그를 잡아 죽였다. 이 때문에 귀신의 무리들이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서 달아났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글을 지었다.



성스런 제왕의 혼이 낳은 아들/ 비형랑이 있었던 집이로다./ 날고 뛰는 여러 귀신들아/ 이곳에는 머물지 말지어다.

나라의 풍속에 이 글을 붙여 귀신을 쫓는다.



◆진지왕

진지왕은 신라의 제25대 왕으로 576년부터 579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진흥왕의 둘째 아들로 세자로 임명된 형이 572년 진흥왕 33년에 죽으면서 왕위를 계승했다.



성은 김이고, 이름은 사륜(舍輪)이며 금륜(金輪)이라고도 한다. 시호는 진지(眞智)이며, 삼국유사에는 이름을 따서 사륜왕이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사도부인 박씨이다.



그는 기오공의 딸인 지도부인 박씨를 왕비로 맞이해 제29대 태종무열왕의 아버지인 이찬 김용춘을 낳았다. 삼국유사는 어머니를 색도부인 박씨, 왕비는 여도부인 박씨로 기록하고 있다.



진지왕은 576년(진흥왕 37) 진흥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진지왕은 즉위하고, 이찬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임명해 나랏일을 맡겼다.



즉위한 이듬해에는 직접 신궁에서 제사를 지내고 대대적으로 죄인을 사면했다. 그해 10월 백제가 쳐들어오자, 이찬 세종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출병케 하여 일선에서 백제군을 크게 이기고 내리서성을 쌓았다.



▲ 서악동 무열왕릉 뒤편으로 4기의 고분이 나란히 있다. 학자들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진지왕릉, 문흥왕릉, 진흥왕릉, 법흥왕릉으로 보고 있다.
▲ 서악동 무열왕릉 뒤편으로 4기의 고분이 나란히 있다. 학자들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진지왕릉, 문흥왕릉, 진흥왕릉, 법흥왕릉으로 보고 있다.


진지왕 3년에는 중국의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수교했다. 또 백제를 공격해 알야산성을 점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듬해 백제는 융현성과 송술성을 쌓아 신라 서북지역에 위치한 산산성, 마지현성, 내리서성으로 가는 통로를 막아 신라를 고립시켰다.



진지왕은 그해 가을에 재위 4년 만에 죽었으며, 영경사 북쪽에 매장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진지왕이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 지 4년 만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러우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 죽은 뒤에 애공사 북쪽에 매장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지왕이 죽은 뒤에 형인 동륜의 아들인 백정(白淨)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가 신라 26대 진평왕이다. 진평왕의 딸인 선덕여왕과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 갈문왕의 딸 진덕여왕 등 동륜의 후손들에게 왕위가 계승되었다.



진덕여왕이 죽은 뒤에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金春秋)가 왕위를 계승해 29대 태종무열왕이 됐다. 신라는 29대 태종무열왕에서 36대 혜공왕까지 진지왕의 후손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 조선시대 경주 김씨 후손들에 의해 진지왕릉으로 비정돼 사적지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서악동 3층석탑 북쪽 선도산 자락의 진지왕릉.
▲ 조선시대 경주 김씨 후손들에 의해 진지왕릉으로 비정돼 사적지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서악동 3층석탑 북쪽 선도산 자락의 진지왕릉.


◆흔적

△진지왕릉: 진지왕릉은 경주시 서악동 산92-2번지 일대 선도산 자락에 5기의 고분과 함께 위치해 있다. 진지왕릉은 2011년 사적 제517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선도산의 남쪽 구릉을 따라 형성된 서악동 고분군의 아래쪽에 만들어진 5기의 고분은 2기는 능선을 따라 나란히 배치되었고, 그 아래에 3기는 옆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진지왕릉은 능선을 따라 배치된 2번째 고분이다.



▲ 서악동 고분군 진지왕릉 가는 길.
▲ 서악동 고분군 진지왕릉 가는 길.


진지왕릉은 아래쪽에 있는 문성왕릉과 마찬가지로 산사면의 일부를 깎아 평탄하게 한 후에 지름 20.6m, 높이 5.5m의 크기를 가진 원형봉토분이다.



봉토의 밑둘레에 자연석 일부가 노출되어 있는데 호석으로 추정된다. 봉분 주변에는 왕릉에 걸맞는 석물이나 장식은 아무것도 없다. 매장주체부는 고분의 입지와 인근의 서악동 고분을 보면 횡혈식석실묘로 추정된다.



현재 고분 앞에는 신라진지왕릉이라는 능의 표석과 안내 표지판이 있다.



진지왕의 무덤을 삼국사기는 영경사 북쪽, 삼국유사는 애공사 북쪽이라 기록하고 있어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고, 진지왕릉 또한 진지왕의 무덤이라는 지정에 대해서는 대부분 학자들은 회의적인 반응이다.



현재 진지왕릉은 1730년에 경주김씨 일족에 의하여 지정되었다. 진지왕릉으로 지정한 원인은 삼국사기에 진지왕의 장지를 진흥왕릉과 함께 영경사 북봉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영경사를 서악동 삼층석탑이 있는 곳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 경주 서악동 무열왕릉 뒤편에 있는 학자들이 주장하는 추정 진지왕릉.
▲ 경주 서악동 무열왕릉 뒤편에 있는 학자들이 주장하는 추정 진지왕릉.


학자들은 서악동 3층석탑은 형식상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여, 6세기후반의 진지왕릉과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1817년 경주를 방문한 김정희는 무열왕릉 뒤편에 나란히 높은 봉분으로 서 있는 4기의 서악동 고분군의 2호분을 진지왕릉으로 보았다.



강인구는 3호분을, 이근직은 무덤의 특징과 묘제, 조영순서 등을 고려하여 서악동 1호분을 진지왕릉으로 보고 있다.



▲ 울산에서 경주 방향으로 흐르는 형산강 상류를 가로지르는 귀교보.
▲ 울산에서 경주 방향으로 흐르는 형산강 상류를 가로지르는 귀교보.


△귀교보와 귀교들: 경부고속도로에서 경주IC로 들어와 첫 번째 만나는 대형 치미가 세워진 큰 교량이 있다. 이 교량 아래로 흐르는 강이 형산강 상류다.



강물을 거슬러 울산 방향으로 1㎞ 남짓 떨어진 곳에 길게 형성된 보가 있다. 사람들은 지금도 이 보를 ‘귀교보’라 부른다.



▲ 귀교보에서 제방을 넘어 넓게 펼쳐진 귀교들.
▲ 귀교보에서 제방을 넘어 넓게 펼쳐진 귀교들.


귀교보 서쪽에 강을 따라 길게 제방이 있고, 제방 넘어 넓은 들을 귀교들이라 부른다. 신라시대로부터 전해오는 이름으로 추정한다.



▲ 귀교보와 귀교들 사이에 길게 형성된 귀교 제방길.
▲ 귀교보와 귀교들 사이에 길게 형성된 귀교 제방길.


◆새로 쓰는 삼국유사: 진지왕의 즉위와 폐위

진흥왕은 큰 아들 동륜을 세자로 책봉하고, 둘째 사륜을 대신으로 임명해 나라일에 직접 참여하게 했다.



그러나 세자 동륜이 죽으면서 흥륜사를 지어 불교적으로 심취했다. 직접 팔관회를 열어 전쟁으로 죽은 백성들을 위로하는 제사를 주관하면서 서서히 나라일에서 물러났다.



이때 거칠부가 사실상 병권을 잡고 내정에도 깊숙이 개입해 사륜을 왕으로 추대했다. 사륜이 신라 제25대 진지왕으로 등극하면서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임명했다. 신라가 거칠부의 세상이 되었다.



▲ 귀교보 입구에 신라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치미를 재현해 세운 교량.
▲ 귀교보 입구에 신라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치미를 재현해 세운 교량.


거칠부가 진지왕 2년에 죽자, 그들의 세력은 급속하게 몰락의 길을 걸었다. 진흥왕대에서부터 동륜의 아들 백정을 옹립하려던 노리부와 김후직, 화문, 노지 등의 인물들이 실세로 자리를 잡았다.



가야 출신인 노리부 등은 거칠부가 죽은 이후로 나라일은 뒤로 하고, 음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진지왕을 폐위시켰다. 진지왕은 신라 최초로 폐위되는 불명예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귀족들은 진지왕에 이어 백정을 신라 제26대 진평왕으로 추대했다. 진평왕은 즉위 당시 10대 초반의 나이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왕권을 강화하는 제도를 만들고, 서서히 국정의 실권을 잡았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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