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반찬/ 공광규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 시집 『말똥 한 덩이』(실천문학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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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도순’이란 낱말이 한 시대의 유행어도 아닌데 요즘엔 이 낱말을 통 듣지 못한다. 오순도순 식구끼리 모여서 밥 한번 같이 먹는 게 쉬운 일이 아닌 세상이다. 한 지붕 아래 사는 사람들끼리의 그저 밥 한 끼인데 무슨 동창회처럼 날을 잡고 받아서야 가능한 회식이 되어버렸다. 가족이 둘러앉아 다정하게 혹은 퉁명스럽게라도 말을 건네고 생선 가운데 토막 언저리에서 젓가락 부딪는 소리를 들으면서 밥을 먹는 일이 보기 드문 현상이 된 것이다.

각자 생활의 사이클이 같지 않으니 제각각 알아서 해결하는 식사가 보편화되어있다. 각자가 외로운 하숙집에 기거하는 동거인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리 연예인이라도 ‘한끼 줍쇼’하며 불쑥 찾아오는 식객이 썩 내키지 않는 것이다. 어쩌다 모여 식사할 경우에도 TV가 아내의 얼굴을 가리고 연예인의 영양가 없는 수다가 자식과의 대화를 가로막곤 한다. 이런 형편이니 그 옛날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 있는 일’은 현실에선 거의 불가능한 정경이 되어버렸다.

10년 전 한 기관의 ‘친족범위에 대한 국민인식’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0%가 4촌 이내를 친족으로 여겼다. 젊은 응답자일수록 그 범위가 좁혀졌다. 지금 조사하면 아마 친족의 범위는 더욱 좁아질 것이다. 예전보다 4촌의 수가 훨씬 적어졌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4촌들의 이름들을 다 모른다고 답한 사람이 절반은 된다고 한다, 촌수 계산 못하는 것을 오히려 당연시하고 겨우 4촌을 알아도 6촌은 거의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고 있다.

내 경우에만 해도 부모들이 살아계실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그 후로는 4촌도 집안에 혼사나 있어야 겨우 얼굴 보고 밥을 같이 먹을 수 있는 형편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우리의 민법에서는 친인척의 범위를 8촌 이내의 혈족과 4촌 이내의 인척(혼인으로 맺은), 그리고 배우자까지로 정해두고 있다. 각종 경제 법령에 적용하는 기준은 조금씩 다르다. 변화한 현실을 반영하여 친족범위를 축소 조정해야한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하물며 친인척은 고사하고 가족들 간에 벌어지는 빈번한 사건만으로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고약하게 치닫고 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극도의 개인주의 사회임을 실감한다. 이러한 배경에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가족은 다행히 건강하고, 힘겹지만 신통하게 지켜져 가고 있다. 하지만 서로 얼굴 쳐다보며 그 얼굴을 반찬삼아 눈빛으로 정을 나누고 풀잎 반찬을 먹든 옛 시절이 마냥 그립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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