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 대대로 이어진 ‘애국의 피’…임진왜란부터 일제시대까지 구국의 선봉에 서다

발행일 2019-06-26 20: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11> 귀봉종택

항일 구국 운동의 산실람 귀봉종택…내앞마을 의성김씨 세거지와 귀봉종택

안동에서 영덕으로 가는 34번 국도변 임하댐 아래, 번듯한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이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의성김씨 집성촌 ‘내앞마을’이다.

내앞마을.
영양 일월산의 지맥이 동남쪽으로 내려오다 서쪽으로 흘러오는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과 만나 이뤄진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마을 ‘내앞’.

밝은 달 아래 귀한 사람이 입을 옷을 세탁하는 모습을 닮은 ‘완사명월형’이라며 내로라하는 풍수가들이 모두 우리나라의 최고 길지중 하나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내앞마을.

귀봉종택은 그 내앞마을 의성김씨 집성촌에서 작은 종가로 통한다. 종가가 엄존하고 종손이 있는데도, 둘째의 작은 종가가 대를 이어오는 전통이 귀봉종택의 위상이다.

귀봉종택.
중시조인 청계 김진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으니 첫째 약봉 극일, 둘째가 귀봉 수일, 셋째가 운암 명일, 넷째가 학봉 성일, 다섯째가 남악 복일이다. 아들 셋이 문과에 오르고 둘이 생원에 합격했으니 세상에서는 ‘오자등과댁’이라 불리었다.

청계를 불천위로 모시는 약봉 극일의 후손이 대종택을 중심으로 종가를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둘째 귀봉 수일의 아들 운천 김용이 불천위로 모셔지면서 일가를 이루었으니 작은 종가로 분파한 것이다. 의성김씨 대종택과 이웃해서 귀봉종택이 자리잡고 있지만, 골목 입구는 다르다.

길게 이어진 골목 끝에 있는 대문채를 들어서면 위압적이지 않은 넓은 마당이 귀봉종택의 위상을 설명해준다.

경북도 민속자료에서 중요민속문화재 267호로 승격된 귀봉종택 사랑채에는 지난 해 가을 불천위 제사를 모실 때 제관들의 소임을 적어놓은 집사기가 아직 그대로 붙어 있다.

이곳에서 해마다 10월 운천 부부의 불천위 제사를 각 각 모셨는데, 올해부터는 운천의 제삿날 두 분을 함께 모시기로 했다고 종택을 관리하는 후손 김상태(57) 씨는 말한다. 제사도 시류를 거스를 수는 없는 모양이다.

귀봉종택 안채.
안채는 보통 양반 민가의 口자보다 훨씬 넓은 ㄱ자형 정침이 여성 공간인 안채와 사랑채, 부엌칸을 이어달아 6칸 넓은 대청이 종택 살림을 짐작케 해 준다. 정침의 이층 다락방 규모나 사랑채의 마루, 제사공간은 종택으로서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운천 김용과 호종일기

운천 김용은 귀봉의 장남으로 향시에 장원하고 33세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갔다. 이듬해 예문관에 발탁될 정도로 왕의 신임을 받았다.

천연두로 고향에 내려와 있던 36세에 임진란이 일어나자 안동수성장으로 ‘모병문’을 지어 의병을 모집하고는 직접 지휘해 왜적을 막아냈다.

운천은 모병문에서 ‘국토가 잠식당하고 또 안으로 나라 기강이 무너진다면 모두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고, “군부를 섬기는 백성으로서 한 번 죽기를 결심하고 결연히 의병 모집에 호응해달라”고 호소했다.

임란 당시 그의 집에는 안집사 백암 김륵이 와 있었는데, 그는 백암과 예안 현감 신지계 등과 함께 의병 결정을 논의했다. 운천은 동생 대박 김철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선두에서 왜적을 막아냈으니 그의 집이 ‘안동 의병 결성의 산실’이었다고 종손 김승태(66)씨는 증언한다.

왜적의 침입으로 선조가 의주로 파천한 뒤 임금을 호종하면 쓴 호종일기(1593년 8월부터 1594년 6월까지)가 있다.

운천이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으로 호가하면서 기록한 호종일기는 보물 484호로 지정돼 지금 국학진흥원에 보관돼 있다.

호종일기는 행재소에서 사관들이 호종하면서 당시의 정사를 기록한 1차적 사료로서 당시의 생활상은 물론, 정치 군사 외교 등 다방면의 자료들을 기록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왜란 당시 병사 4만을 이끌고 우리나라를 도우러 왔던 명나라 제독 이여송과 대장 양원, 오유충과 유정을 비롯한 여러 장수와 군졸들의 언행과 생활, 그리고 이들을 대접하며 여러 면에서 대면했던 접반사 이덕형과 김수 윤두수 심희수 이항복 심수경 장운익 등의 활약이 소상히 기록돼 있다.

예문관에 있을 때는 가차 없는 직필로 난세에 맞섰고, 사간원 시절에는 기축옥사에서 부당하게 희생당한 최영경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합계를 올려 주위 사류들을 통쾌 찬탄케 했다고 미수 허목은 묘비명에 적었다.

홍문관 사헌부 시절 지론이 정직해 조정과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던 것이다. 그의 직설은 춘추시대 신하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전쟁에 패한 목공의 예를 들면서 광해군의 실덕을 거론해 왕의 과오를 성심으로 바로잡으려 했을 정도였다고 후손들은 전한다.

임진란 이후, 당쟁이 치열해 지면서 북인 정권에서 외직으로 밀려난 운천은 선산부사와 상주목사, 예천군수와 홍주 여주 목사 등 다섯고을의 목민관을 지내면서 가는 곳마다 선정을 펼쳐 지역민의 칭송을 받았음이 묘비명과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임진란 7년 전쟁으로 나라 곳곳의 민생은 피폐해졌고 민심마저 흉흉했으나 운천은 무너진 나라 기강을 지역에서부터 바로 세우고 파괴된 국토를 복구해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백성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풍속을 선도하기 위해 솔선 실천했다.

일생을 벼슬에도 명리에 휘둘리지 않고 청빈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으며 나라와 백성이 필요로 할 때는 몸을 바쳤으니 오로지 나라와 참다운 군자의 길을 걸었던 운천 김용으로 역사는 기록한다.

◆독립운동과 의성김씨 귀봉파

항일독립운동사에서 안동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고, 그 중에서도 의성김씨의 희생과 헌신은 단연 돋보인다.

독립운동사에 따르면 내앞마을은 1895년 의병항쟁에서부터 독립운동에 나섰다. 일제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기 시작한 1904년 안동 유림들이 위정척사의 애국 계몽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으니 그 시발점이 내앞이다.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고 가산을 독립운동에 쏟아 부었던 운천의 후손들은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과 포장을 받은 사람만도 18명에 달할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구국 항일 호국운동에 몸담았다.

경북도독립기념관이 내앞마을에 들어선 것이 의성김씨 가문의 정신적 물질적 기여에 보답하는 차원이기도 했으니, 귀봉종택이 항일 국난 극복의 산실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강윤정 경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은 말한다.

귀봉 김수일의 11대손인 비서 김대락은 사재를 털어 근대식 교육기관 협동학교를 여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1910년 치욕적 병탄으로 나라가 망하자 만삭의 손부와 손녀까지 대동하고 만주로 망명을 선택한다. 백두산 아래 한인이라는 뜻의 ‘백하’로 불렸던 것도 그때부터다.

경북도 기념물 137호인 ‘백하구려’는 현재 김대락의 종증손 김시승(83) 씨가 거주 관리하고 있다.

백하구려.
정면 8칸으로, 서쪽 4칸은 사랑채이고, 동쪽 4칸은 중문간을 비롯한 아래채이다. 사랑채에 걸린 ‘백하구려’ 라는 현판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데, 비서 김대락이 만주로 망명가서 백하라는 호를 썼고, 이 집은 김대락이 만주로 망명하기 전 협동학교 교사로 사용됐던 곳이다.

김 씨는 “지금의 백하구려는 협동학교 당시의 집이 아니다.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간판 붙일 곳이 없어 당시 초가집에 간판을 붙였는데,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망명간 뒤 협동학교 교실로 쓰던 10칸이 뜯겼다. 지금 문화재청에서 복원해 주겠다는 제의도 있지만, 지금 집도 관리하기 힘들다”며 거절했다고 말한다.

김대락의 누이 김락은 독립운동의 한가운데를 지킨 여성 독립운동가다. 파리장서 의거라 부르는 1차 유림단 의거의 핵심 이중업의 아내이자, 단식 순국한 의병장 이만도의 며느리이며, 광복회와 제2차 유림단 의거에 참여한 이동흠 이종흠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3·1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 끌려가 고문 끝에 두 눈을 모두 잃는다.

일송 김동삼은 본명이 김긍식이다. 그도 만주로 망명해서 이름을 동삼으로 바꾸었다. 김대락과는 같은 집안의 족질관계다.

항일운동을 하면서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또 만주로 떠날 때도 서로 의논했으며,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면서도 동지 이상으로 혈족의 의리를 보여줬다. 만주에서는 서로군정서의 참모장으로 청산리전투에도 참여했으며, 임정 국무령 이상룡이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으나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취임하지 않았다.

1931년 하얼빈에서 일경에 체포돼 국내로 압송돼 평양법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살이 중,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의 유해를 거둬들여 장사지내 준 만해 한용운이 일생 한 번 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올 만큼, 선생의 애국 항일 운동과 투철한 민족 독립정신은 후세 귀감이 되고 있다.

일송 김동삼의 평가와 대우에 대해 김시승 씨는 “안동의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이 내앞마을에 와서 ‘진정한 의미의 독립운동가는 일송 한 사람 뿐’이라는 칭송을 들었지만, 내앞마을에는 김동삼의 생가 표지석 하나가 전부”라며 섭섭해 한다.

“일송의 항일투쟁 독립운동 공적이 남정현 지사나 신돌석 장군의 공적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며 공적이나 평가에 비해 정부나 학계의 대접이 섭섭한 면이 있음을 내비친다.

◆백운정과 의성김씨

내앞마을에서 반변천 건너 나지막한 산등성이에 자리잡은 백운정은 청계 김진의 뜻에 따라 아들 귀봉이 41세때 지어 후학들을 가르치며 만년에 힐링하던 곳이다.

백운정.
동향으로 내앞마을을 조망하고 있는 백운정 마루에서 반변천을 바라보면, 강물이 호수처럼 드넓게 펼쳐져 내앞마을을 지켜주는 개호숲과 함께 한 편의 동양화를 이루고 있다.

귀봉의 아들 운천 김용은 병조참의와 명나라의 사신으로 갈 동지사에 제수되었으나, 세상은 광해군 등극 이후 북인의 횡포가 더해지면서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상황에 이르자 세도의 뜻을 단념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지낸 곳이 백운정이다.

백운정 현판.
400여년 전 귀봉과 운천 부자 생전에는 얕은 내를 건너다녔을 것이 지금은 강을 따라 보조댐까지 가서 강변으로 거슬러 가야 한다.

안내하는 귀봉의 후손 김상태(57)씨는 “임하댐이 건설 되기 전 어릴 때는 반변천을 건너 백운정을 찾았다”고 회고한다. 임하댐 건설로 넓은 모래밭이 지금은 호수가 되어 버렸으니 옛 정취는 시구와 이야기로만 전해지고 있다.

백운정 누마루 현판은 미수 허목이 썼는데, 백운정 마루에서 강변 풍경을 보면 글씨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정말 정자와 주변 풍광을 절묘하게 묘사한 글씨임을 느낄 수 있다.

많은 현판 중에는 퇴계 이황의 조양문과 이락문 두 편도 걸려 있다.

귀봉의 후손들이 관리하는 백운정은 여러 차례 중수를 했으나, 문화재가 아니어서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 푸른 색 페인트로 서까래와 목조건물을 보호하려는 듯 페인트칠을 해놓아 아쉬움을 주고 있다.

이경우 언론인
〈이경우 언론인〉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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