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잎부터 남달랐던 매의 눈 거침없던 ‘여성파워’로 우뚝서다

발행일 2019-07-01 20: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17> 선덕여왕 지기삼사

신라시대 최초의 여왕, 세 가지 지혜 역사에 기록으로 남아, 첨성대와 황룡사지구층목탑 기록적인 건축물 세워

경주시 보문동 낭산 정상에 위치한 선덕여왕릉. 여왕은 생전에 도리천에 장사지내라는 유지를 남겼다. 선덕 자신이 죽은 이후에 무덤 아래 사천왕사가 들어설 것을 예측한 앞을 내다보는 지혜가 새삼 증명됐다.


선덕여왕은 신라 중기의 왕으로 많은 기록을 남겼다. 여성으로는 신라시대 최초로 왕이 되면서 신라 56왕 중에서 3명의 여왕을 배출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여성이었지만 많은 업적을 남긴 왕으로 오래도록 칭송이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학문을 장려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현대 과학으로도 풀기 어려운 기하학적인 숙제를 남기고 있는 첨성대를 건축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황룡사구층목탑을 세운 일이다.

인재를 양성하고, 적절하게 부릴 줄 알았다. 김춘추와 김유신과 같은 인물을 활용해 고구려, 백제와의 전쟁을 지속적으로 치루면서 삼국의 균형을 유지했다. 끝내 당나라와의 외교를 통해 문물을 받아들이는 한편, 약소국의 서러움을 떨치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무엇보다 삼국유사에서 기록하고 있는 선덕여왕의 특별하게 뛰어난 지혜는 지금까지 학자들의 보고서에 오르내리며 회자되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역사서에서 선덕여왕의 무덤에 대한 기록이 일치해 신라 중기 이전의 왕릉 위치가 정확하게 드러난 최초의 사례로 소개되고 있다.

◆삼국유사: 선덕여왕 지기삼사

제27대 덕만의 시호는 선덕여대왕으로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정관 6년 임진(632)에 왕위에 올라 16년간 나라를 다스리면서 미리 알아맞힌 일이 모두 세 가지 있었다.

황룡사구층목탑의 심초석. 발굴 당시 심초석 아래에서 백자항아리를 비롯해 많은 유물이 출토되면서 황룡사구층목탑의 건축과 수리, 신라의 역사 단면을 알게 됐다.


첫째는 당나라 태종이 붉은색·자주색·흰색의 세 가지 빛깔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그 씨를 석되를 보내왔다.

왕이 그려진 꽃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필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 하면서 이내 뜰에 꽃을 심어라고 명령하여 그 꽃이 피고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더니 과연 왕의 말과 같았다.

둘째는 영묘사 옥문지에서 겨울철인데도 많은 개구리들이 모여 3, 4일 동안 울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이하게 생각하여 왕에게 물었더니, 왕이 급히 각간 알천과 필탄 등에게 명령하여 날랜 병사 2천 명을 뽑아 빨리 서쪽 교외로 나가 ‘여근곡’을 물어서 가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그들을 습격하여 죽이라고 명령했다.

두 명의 각간이 명을 받고 각각 병사 1천 명씩 거느리고 서쪽 교외로 가서 물었더니 과연 여근곡이 있었다. 그곳에 숨어 있는 백제 군사를 모두 잡아 죽였다.

셋째는 왕이 아무 병도 없는데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짐이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 속에 장사지내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그곳을 알지 못하여 어디냐고 여쭈었더니 왕이 말하기를 “낭산 남쪽이다”라 했다.

그 달 그 날이 되자, 과연 왕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낭산 남쪽에 장사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이 왕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를 지었다. 불경에 ‘사천왕천의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했으니, 이로써 대왕이 영험하고 신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의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여쭙기를 “어떻게 모란꽃과 개구리의 두 사건을 미리 알았습니까?”라 하니, 왕이 “그려진 꽃에 나비가 없어서 향기가 없음을 알았다. 이는 바로 당나라 황제가 나의 남편 없음을 업신여긴 것이다.

“개구리의 성난 모습은 병사의 형상이며 옥문이라는 것은 여인의 음부이고, 여자는 음이요, 그 색깔은 흰색이다. 흰색은 서쪽 방향이기 때문에 서쪽에 병사가 있음을 알았다. 남자의 성기가 여자의 옥문으로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다. 그래서 적병을 쉽게 잡을 줄 알았다”라 하니, 이에 여러 신하들 모두가 왕의 지혜에 탄복했다.

선덕왕이 영묘사를 세운 일은 양지 스님 전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딴 기록에는 이 왕 때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고 했다.

◆선덕여왕

신라 27대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맏딸이다. 이름은 덕만이었다. 632년에 왕위에 올라 647년까지 16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1949년에 선덕여왕릉을 정비·보수했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비석이 선덕여왕릉 입구에 세워져 있다.


선덕여왕은 어릴 때부터 지혜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나라 태종이 보낸 그림을 보고 향기가 없는 꽃이라는 것을 알아 맞췄고, 옥문지에 백제 군사들이 숨어 있는 것을 개구리들의 징후를 보고 예측했다. 이어 자신의 장지를 낭산으로 지정하면서 도리천이라 불러 미리 사천왕사가 들어설 것을 짐작하는 등으로 선덕여왕은 특별한 지혜를 가졌다.

선덕여왕은 신라의 인재들을 당나라로 유학시켜 공부하게 하고, 신라에도 국학을 설립해 인재 양성에 힘썼다. 또 백제와 고구려 등의 침략전쟁이 많아 어려움을 겪으면서 당나라와의 외교를 통해 삼국이 서로 견제하도록 했다.

기록적인 업적들도 길이 전해지고 있다. 첨성대를 쌓아 천문을 살피거나 나라의 길흉을 점치며 안녕을 빌었다. 지금도 완벽하게 흉내낼 수 없는 기하학적 기술로 황룡사에 9층목탑을 세워 불교중흥으로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결국 상대등 비담의 난을 겪으면서 재위 16년만에 생을 마감하고, 그의 4촌 진덕여왕이 왕위를 이었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릉은 1949년에 대대적으로 정비보수돼 지금의 모습으로 관리되고 있다. 선덕여왕릉은 역사문화를 탐방하는 연구가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사적지다.


◆흔적

△선덕여왕릉: 선덕여왕릉은 경주시 보문동에 있는 신라 27대 왕인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무덤으로, 1969년 사적 제18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선덕여왕릉은 높이 6.8m, 지름 23.6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으로, 밑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2∼3단의 둘레돌을 쌓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여왕이 죽거든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하였으나, 신하들이 이해를 못하자 여왕이 직접 도리천이 ‘낭산 정상’이라 알려주었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낭산에 사천왕사를 지었고, ‘낭산의 정상이 도리천’이라 한 여왕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선덕여왕릉은 소나무 숲으로 우거져 있다. 왕릉으로 드나드는 산책로는 계절별로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한다.


여왕릉은 1949년 대대적인 정비보수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관리되고 있다.

경주에서 울산으로 이어지는 7번 국도를 따라가다 사천왕사지 입구에서 산길로 접어드는 길은 소나무숲이 우거진 산책로로 조성돼 여름에도 시원한 그늘이 드리워진다.

왕릉은 공원 안의 조형물처럼 조용하게 숲 속에 위치해 있다. 드라마 ‘선덕여왕’ 이후 찾는 발길이 부쩍 늘었다.

선덕여왕이 ‘자장’의 건의로 백제 아비지를 초청해 용춘을 총감독으로 삼아 건축한 황룡사구층목탑을 10분의 1 크기로 추정 복원한 모형탑. 황룡사역사문화관 전시실에 있다.


△황룡사구층목탑: 선덕여왕이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온 ‘자장’의 건의로 황룡사에 구층목탑을 건립했다. 여동생의 남편이자 김춘추의 아버지 용춘을 건축의 총괄지휘자로 임명했다. 건축기술이 뛰어난 백제의 아비지를 초빙해 역사에 길이 남을 예술작품으로 건립했다.

높이 82m로 지금의 27층 높이 건축물이다. 순수 목조건축물로 현대 건축기술로도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의 과학이 깃들어 있다.

심초석에서 당나라가 제조한 것으로 밝혀진 백자항아리가 발견돼 당나라와의 문물교류가 활발했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1238년 몽고 침략전쟁 당시 불에 타 없어지고, 현재 주춧돌과 심초석만 남아 있다.

선덕여왕이 건축한 첨성대. 지금도 천문대 인지 제사를 지낸 제단인지 정확한 용도는 모르지만, 많은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당시 뛰어난 과학을 보여주는 시설물이다.


△첨성대: 첨성대는 신라 천 년을 지나 지금까지 동부사적지 가운데 위치해 경주역사문화관광의 1번지로 주목받고 있다. 별을 관측하는 천문대라는 설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라는 설이 부딪치고 있다. 정확한 용도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첨성대는 27계단으로 쌓아 27대 선덕여왕과 의미가 겹친다. 맨 윗층의 사각형 단과 아래층 기단을 합하면 29층으로 음력의 한 달에 해당한다. 중앙의 창문까지 12단이고, 창문 위에서 꼭대기까지 또 12단인데 이것은 1년 12달과 24절기로 풀이된다. 첨성대를 쌓은 돌벽돌은 365개로 1년의 길이에 해당된다.

기단석은 네 방향으로 동서남북을 정확하게 맞추고 있고, 남향의 창문은 태양이 비칠 때 춘분과 하지, 추분, 동지를 측정할 수 있게 했다.

첨성대는 동부사적지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에 핑크뮬리 등 꽃밭을 조성하는 등 역사문화도시 경주의 관광1번지로 가꾸어지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첨성대의 구조와 기록만으로 첨성대가 어떠한 기능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오면서 천문대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던 것과 연계해 천문대와 관련된 시설로 추정할 뿐이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선덕여왕

진평왕은 아들 없이 딸만 셋을 두었다. 나이가 들면서 왕위 계승을 두고 고심하다가 맏딸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했다.

딸의 안정적인 위치를 염려해 위협적인 요인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삼촌 진지왕의 아들들이었다. 지혜롭고 무예가 뛰어난 장조카 용수를 맏사위로 맞아들였다.

진흥왕으로부터 시작해 4왕이 100년에 걸쳐 완성한 황룡사. 선덕여왕이 국운을 왕성하게 하기 위해 황룡사에 구층목탑을 건립했지만, 1238년 몽고난에 불타고, 지금은 심초석과 주춧돌만 오롯이 남아 있다.


그리고는 중책을 맡겨 나라의 일을 배우고 익히도록 했다. 지혜로우면서도 다양한 재주를 겸비한 둘째 조카 용춘도 둘째 사위로 들여 반란의 싹을 없앴다. 또한 셋째 딸 선화공주는 백제의 무왕에게 시집보내 백제의 공격을 완화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다.

선덕여왕은 지혜로웠지만, 그 또한 아들을 낳지 못했다. 아버지 진평왕이 54년이나 왕위에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중년이 훌쩍 지난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았다. 선덕여왕은 왕위에 올라 전쟁을 치르랴 나라의 살림을 꾸리랴 자신을 돌아볼 정신이 없었다.

증조할아버지 진흥왕이 무자비하게 넓혀 놓은 영토를 지키기 위한 전쟁은 끝이 없었다. 고구려와 백제와의 전쟁은 잠잠할 날이 없었고, 왜구의 침략도 심심치 않았다.

아버지 진평왕이 전쟁을 하면서 화랑을 양성해 군사력을 키웠듯이 선덕여왕도 젊은이들의 교육에 힘써 국학을 진흥하고 화랑을 육성했다.

화랑들의 기개가 충만하면서 중앙정치권은 귀족들의 세력다툼으로 어지러워졌다.

선덕여왕은 왕권의 안정과 나라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친족들의 힘을 키우고 중용하는 전략과 유능한 청년을 선발해 중임을 맡기는 정책을 동시에 운용했다.

남편과 시동생이었던 용수와 용춘에게 나라의 살림을 맡기는 한편 용춘의 아들, 조카 김춘추를 키워 중요한 일을 하도록 했다. 이어 지략과 힘을 가진 김유신과 가까이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측근에 두면서 친화세력을 키웠다.

선덕여왕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비담의 반란 중심터 명활산성. 명활산성은 그 이후 역사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최근 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명활산성 북문지.


용춘과 김유신이 선덕여왕 주변에 두텁게 포진하면서 가까이 접근할 수 없게 된 비담은 상대등이라는 직위를 이용해 반란을 도모했다. 끝내 선덕여왕의 가슴에 비수를 꼽았지만, 자신도 춘추와 김유신에게 제압당하면서 빗나간 사랑의 비운의 주인공으로 전락했다.

선덕여왕의 선택은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는 주춧돌을 놓았지만, 자신은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을 스스로 지게 했다.

*기획연재 중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지만, 새로운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인위적으로 구성한 픽션입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댓글 (0)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댓글 환경에 동참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