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권 신공항 재검토와 민주주의

발행일 2019-07-01 15:56:52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영남권 신공항 재검토와 민주주의

홍덕률

대구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절차적 정당성’은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절차상의 정당성만 확보됐다면 결과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민주적 정책결정은 최악의 결과를 낳기도 한다. 소크라테스가 민주적 사법제도 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것, 히틀러가 선거로 선출된 것 등이 대표적인 예다. 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한 비판과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모색이 끊이지 않고 있는 이유기도 하다.

‘절차적 정당성’의 핵심은 둘이다. 첫째는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다. 자유 없는 민주주의는 허구다. 둘째는 그 자유가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연령 성 지역 종교 피부색 등, 어떤 이유로든 자유가 차별적으로 주어진다면 민주주의라 할 수 없다.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다. 두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에야 설령 동의하지 않는 국민에게도 결정에 승복할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통한 갈등조정이고 사회통합인 것이다.

2016년 6월이었다. 당시 정부는 영남권 신공항을 둘러싼 10년 넘은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정도로 매듭지을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때문이었다. 세계적 전문기업인 프랑스 파리공항공단 엔지니어링에 연구용역을 맡긴 것이 하나고, 최종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다섯 단체장들로부터 받아낸 것이 다른 하나였다. 불복의 명분을 차단하기 위한 최소한의 절차였다.

결론은 밀양도 가덕도도 아닌 김해공항 확장이었다. TK와 PK 모두 크게 허탈해 했다. 정치적 결정이라는 불만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정도로 가라앉은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최소한의 절차적 정당성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PK 단체장들이 내년 총선을 앞두고 또다시 불을 붙이고 나선 것이다. TK 단체장들이 빌미를 줬다는 비판이 없지 않았기에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중앙정부였다. 국익과 갈등 조정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국무총리실까지 PK의 주장을 덥석 받아든 모양새를 취한 것이다. 절차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남권 신공항을 건설해야 할 것인지를 두고 수도권과 영남권이 논쟁했을 때 중앙정부가 택했던 핵심 가치는 ‘국가균형발전’이었다. 신공항을 영남의 어느 지역에 건설할 것인지 결정할 때 지난 정부가 중시했던 핵심 가치는 ‘절차적 합리성’이었다. PK 단체장들의 재검토 요구에 맞닥뜨린 현 정부가 지켜야 할 핵심 가치는 ‘더 촘촘한 민주주의’와 그를 통한 ‘신뢰상실의 위기극복’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더 촘촘한 민주주의’는 한번 내린 결정을 다시 거론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지켜야 할 절차와 관련된다.

재검증이든 재검토든, 민주적 절차를 거친 결정을 다시 거론하려면 최소한 두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는 절차상에 심각한 하자나 있었거나 혹은 새롭게 판단해야 할 정도의 중대한 사정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한다. 둘째는 2016년 합의에 서명했던 5개 지역 단체장들이 재검토의 불가피성에 동의해야 한다. 신공항의 성격과 역할이 변경되어 기존의 결정을 백지화하고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밟아야 할 경우라도, 5개 지역 단체장들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더 촘촘하게 설계된 민주적 절차’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무총리실이 대구 경북을 배제한 채 부산 울산 경남 단체장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재검증을 약속한 것은, 최소한의 민주적 절차도 갖추지 않은 졸속이라고 비판받아 마땅하다. 중앙정부의 행정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크게 실추될 것이고 지역갈등과 반발도 불을 보듯 뻔하다.

답은 간단하다. 설령 재검증에 들어가더라도 ‘국익과 갈등조정’의 관점에 다시 서야 한다. 중앙정부마저 이렇게 큰 국사를 총선 관리의 관점으로 접근해선 안된다. 그 위에서 ‘절차적 정당성’을 훼손하지 않는 방식으로 절차와 과정을 정비해야 한다. 최소한의 요건이다.

대구경북의 내부 사정은 못지않게 딱하다. 가장 큰 문제는 사분오열이다. 지역의 여와 야, 단체장과 시민단체가 각각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화도 없다. 국무총리실의 재검토 결정까지 끌어낸 PK의 일사불란한 밀어부치기와 비교하면 취약하기 그지없다. 중앙정부가 절차상 요건을 갖춰 재검증에 들어갈 경우를 대비해 지금부터라도 머리를 맞대야 한다. 모두가 정략적 이해관계를 떠나 지역과 나라의 내일을 준비하는 자세로 하나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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