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을 읽어야 숨은 뜻이 보인다

오철환

객원논설위원

만남은 사는 동안 수시로 일어난다. 만남은 탐색이고 힘겨루기다. 만남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 과정에서 관계가 형성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관계에는 힘의 논리와 적자생존 원리가 작동한다. 힘은 만남 가운데 항상 잠복하여 상황을 변화시킨다. 지배할 수도 있지만 종속될 수도 있다. 만남을 거듭하다가 보면 정이 들기도 한다. 휴머니즘이 인간다운 삶을 일구어 간다. 그렇다고 휴머니즘이 항상 좋은 열매만 선물하지는 않는다. 살다가 보면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서로 찌지고 볶고 물어뜯는다. 일방적으로 피해를 주기도 하고 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남은 무언가의 씨앗이다. 좋은 싹이 나도록 정성을 다하는 것은 인간의 일이고 좋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신의 뜻이다. 어쨌거나 만남은 소중하다. 그 만남 가운데 국가원수 간의 만남, 정상회담은 조금 특별하다. ‘국가는 감정이 없고, 국가원수는 그런 국가를 대표하는 공인’이라는 점에서 그 특별함이 발생한다. 그 주체가 개인이든 국가든 만남에는 냉엄한 힘의 논리가 기본으로 바닥에 깔린다. 힘은 세상사 기본 원소를 형성한다. 만남이 쌓이면 국가원수 개인 차원에선 비록 정이 생길 수 있겠지만 국가 차원에선 정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자국제일주의가 휴머니즘을 대체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즉흥적 제안으로 남·북·미 DMZ 만남이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번개다. 정말 놀랄만한 이벤트임에 틀림이 없다. 이 이벤트가 단지 보기 좋은 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이 만남이 우리에게 장차 희망의 싹으로 자라나길 기대한다. 국가원수의 만남은 국가의 만남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원수는 개인의 속성을 초월한다. 국가원수의 만남은 정을 나누고 우의를 돈독히 하는 사적인 일이 아니고, 국가의 이익을 조율하고 절충하는 국사다. 국가원수가 개인의 정을 나누고 다지는 척해도 그건 제스처에 불과하다. 우정과 사랑은 입에 발린 말이다. 상대방의 이성을 잠재우고 자신의 의도를 숨기려는 속임수일 뿐이다. 정상회담은 결국 국익을 두고 싸우는 대결의 무대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제대로 봐야 한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이번 남·북·미 DMZ 만남의 행간에 숨은 뜻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의 목적은 내년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한 포인트 적립이다. 여기에서 북한은 미국도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위험한 핵보유국으로 함부로 때리기 버거운 상대라는 숨은 뜻이 읽힌다. 북한은 미국을 위협하는 최대의 카운터파트라는 함의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최근 러시아와 중국에 공을 들인 북한 외교가 플러스알파로 작용했다. 북한 외교의 개가다. 한편, 이번 번개 만남을 통해 하노이에서 구겼던 존엄의 체면을 만회하려는 북한의 속셈이 쉽게 읽힌다.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를 도와줄 힘이 북한에게 있고 경우에 따라서 그렇게 협조할 용의가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대한민국의 총선을 좌지우지할 카드를 북한이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은연중에 과시하기도 한다. 지난번 지방선거에서 북한은 싱가포르 미·북회담을 통해 대한민국 선거판을 평정했다. 대한민국은 이미 종속적인 존재로 전락했다.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거듭 밝혀왔지만 정작 그 숨은 뜻은 정반대로 읽힌다. 북한은 벌써 대한민국의 손아귀를 벗어난 맹수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대한민국이 오히려 관리대상이다. 대한민국은 한 수 아래에서 주변을 얼른거리는 뜨거운 감자다. 북한은 군사력만 믿고 무례하기 그지없다.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를 피하긴 하지만 미국은 그나마 대놓고 무례하게 굴진 않는다. 대한민국은 그래도 일편단심 민들레다. 개인이라면 동정이라도 받을 테지만 국가엔 동정 따윈 없다. 남·북·미 DMZ 만남의 공식 성명은 당연히 없다. 숨은 뜻이 더 흥미롭다.

개인 간에 번개 치는 모습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국가 간에 번개 치는 모습은 드물고 희한한 풍경이다. 국가원수가 그냥 지나는 길에 즉흥적으로 무작정 다른 나라 국가원수를 만나는 일은 정말 희귀한 사건이다. 실무적인 정밀한 협의를 거쳐 그 합의사항이 결정되면 정상의 만남을 통해 그 성과가 공식적으로 공표되는 것이 통상적 정상회담의 얼개다. 종잡을 수 없는 감정상태에 따라 국가원수가 공식적 만남을 즉흥적으로 결정하고 그 만남 자체마저 국익을 떠나 개인적으로 이용하는 행태는 권한남용이자 예산 횡령이다. 국가원수는 국민이 국가권력을 잠시 맡겨둔 공인이다. 즉흥적으로 언행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라면 공인의 자격 여부를 의심해 봐야 한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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