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말 “밥 한번 하자”

박운석

패밀리푸드협동조합 이사장

2020, 119, 1899…

난수표 같은 이 숫자들은 기업체에서 만든 새로운 회식문화 캠페인이다. 2차 없이 20시까지(2020), 한 장소에서 1차만 9시까지(119), 회식은 1차만 8시에서 9시에 끝내자(1899)는 의미다.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과 미투 영향으로 저녁 회식이 줄어드는 현상을 대변하는 말들이지만 최근 ‘제2윤창호법’이 시행되면서 음주 문화가 대폭 바뀌고 있다. 음주단속기준을 강화한 개정 도로교통법인 ‘제2윤창호법’은 음주운전자에 대한 면허정지 기준을 혈중 알코올농도 0.05%에서 0.03%로, 면허취소 기준을 0.10%에서 0.08%로 강화했다.

혈중 알코올농도 0.03%는 소주 한 잔을 마신 후 1시간가량 지났을 때 측정되는 수치다. 소주 한 잔만 마시고 운전대를 잡아도 단속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직장인들 사이에서 회식을 자제하거나 10시 이전에 귀가하려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숙취로도 단속될 가능성이 높아 아침 출근길 걱정에 평일 술자리 자체를 피하려는 움직임까지 있다. 심지어 대리운전 피크시간대가 1시간 가량 앞당겨지고 출근시간대 대리운전도 조만간 도입될 것으로 보인다.

제2윤창호법이 음주 풍속도를 급속도로 바꾸긴 했지만 그전부터 음주 문화는 여러 분야에서 조금씩 바뀌어왔다.

취하기 위해 마시는 술에서 즐겁게 마시자는 술로 바뀌고 있는 게 대세이다. 대표적인 변화가 음식과 곁들여 마시는 맥주문화다. 주52시간 근무제 도입으로 단체회식이 줄면서 부어라마셔라 하는 분위기가 사라진 대신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먹으며 한두잔의 맥주를 곁들이는 쪽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병맥주를 판매하는 카페가 늘어나고 있는 것도 새로운 변화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수제맥주도 병에 담은 제품이 늘어나면서 커피와 빵 위주였던 카페에 조금씩 병맥주가 들어가고 있다. 다른 일행들은 커피를 마시더라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맥주를 마시겠다는 트렌드를 반영한 풍경이다.

낮맥(낮에 마시는 맥주)도 흔한 풍경이 됐다. 저녁 회식이 사라진 게 원인으로 취하기 위해서라기보다 회식 기분을 내는 것이 주목적이다. 최근 취업포털사이트인 잡코리아가 직장인 23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가 흥미롭다. 직장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회식 유형을 묻는 설문에 58.7%가 ‘점심시간에 하는 맛집 탐방’이라고 답한 것이다. 제일 좋아할 것 같은 회식형태인 문화회식(공연 등을 관람하는 형태)은 36.5%로 그 다음을 차지했다.

혼술(혼자 마시는 술)과 홈술(집에서 마시는 술)도 주류소비의 대세로 자리잡았다. 1~2인 가구가 전체의 50%를 넘어서면서 혼자서 또는 가족과 가볍게 맥주 한잔을 하는 이들을 겨냥한 미니맥주냉장고가 시판되고 수제맥주를 캔에 담아 배달해주는 서비스까지 등장했다.

이 같은 사회분위기 탓에 자영업자들은 매출에 직격탄을 맞고 있다. 김영란법(부패방지법)으로 한차례 타격을 입었던 외식업은 이번 제2윤창호법으로 더 깊은 불황 속으로 빠져들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이미 호프 혹은 치킨집 등 2차로 주로 찾는 자영업소엔 손님들의 발길이 확 줄었다고 아우성이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종업원들의 근무시간을 줄였던 자영업자들은 이제 마감시간까지 앞당길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음주문화의 변화로 외식업계가 헤쳐 나가야 할 파도가 너무 거세다. 김영란법의 거센 물살을 막 건넜고 최저임금 인상이라는 파도도 힘겹게 건너고 있는 터에 뒤이어 닥칠 엄청난 쓰나미를 걱정해야 하는 형국이다.

주당들 입장에선 아쉬운 점이 더 많다. 업무 마감시간이 가까워지면 서로 눈짓으로도 통했던 퇴근길 소주 한 잔도 이제는 사라지고 있다. 서로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며 정을 나누던 낭만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겐 아련한 기억의 한 장면일 수밖에 없다.

반주문화가 사라지는 것은 더 서운하다. 통상적인 인사로 건넸던 ‘언제 밥 한번 하자’는 말은 식사 하면서 술 한 잔 하자는 말이었다. 이제는 제2윤창호법 시행으로 잔뜩 움츠린 주당들에게서 이런 인사말을 듣는 것도 어렵게 됐다. 무엇보다 내 의지에 따라 음주를 줄이는 게 아니라 이 사회가 반강제로 술자리를 줄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개운치 않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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