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애(貨幣愛)를 위한 변명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이사

흔히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또는 불안이 커질수록 금이나 국채, 부동산, 달러화 등 소위 안전자산에 대한 선호성향이 높아지게 되고, 이것이 불황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또는 불안은 단순히 경기뿐 아니라 극단적으로는 전쟁과 같이 기업경영이나 개인 생활의 안정성을 저해하는 경제사회 전반의 변화를 말한다. 만약 이러한 변화가 있거나 발생 가능성이 커지게 되면 기업이나 개인은 화폐를 비롯한 안전자산을 축적하고자 하는 현상, 이른바 화폐애가 강해지게 된다. 이는 소위 안전자산이란 국가가 지급을 보증하는 국채처럼 채무불이행 위험이 거의 제로에 가깝고, 시장가격의 변동으로부터 어느 정도 위험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이 강해진다면 시중에 풀려있는 자금이 소비와 투자로 연결되지 않아 경제 전반의 수요 부족과 이로 인한 불황을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 경제도 기업과 가계의 강한 화폐애로 경기 회복이 지연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으며 대표적인 안전자산에 대한 선호현상이 강해지고 있다. 국제 금값은 2013년 이래 최고 수준인 온스 당 1,400달러대를 기록 중이고, 원화 대비 달러화와 엔화 강세 현상도 이어지고 있다. 국채 수요 또한 증가하면서 금리 하락세가 이어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국내 부동산 가격도 마찬가지로 정부의 강력한 수요억제책에도 불구하고 역대 최고 수준에서 큰 변동 없이 오히려 재상승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소위 시중 부동자금이라 불리는 좀 더 나은 투자처를 찾지 못해 대기 중인 자금 규모도 엄청나다. 한국은행 등에 따르면 올해 3월말 현재 현금통화나 요구불예금, 수시입출금이 가능한 저축성 예금 등 우리 기업과 가계 등이 보유하고 있는 비교적 단기간 내 유동화가 가능한 자금이 약 1천조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특히, 이처럼 많은 자금이 시중에 풀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전자산에만 자금이 쏠리거나 단지 고여있기만 해서는 경기 회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경기 부진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부동산 시장으로 대규모 자금이 유입된다면 그야말로 경제버블만 키울 것이고, 금리를 낮춰 투자와 소비 등 경기를 진작시키려는 금융당국의 정책효과도 크게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이처럼 강한 가계와 기업의 화폐애에 대해 마냥 비난만 할 수 있을까? 우선, 가계 부문을 살펴보자. 쌓여가는 부채, 불안한 일자리로 인한 생애소득 감소 가능성 확대, 인플레이션 등과 같이 가계를 위협하는 요인들이 점점 커지고 있는 데 반해, 자녀 양육과 노후 비용 등 필요 자금은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게 실상이다. 여기에 혹시나 생길지도 모를 질병이나 상해에도 대응해야 한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가계가 소비 의사결정을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할 뿐 아니라 중장기적으로 볼 때 합리적이기도 하다. 다가올 큰비를 피하고자 조그마한 우산이라도 준비하려는 가계에 이기적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과도한 사내유보금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받는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국내외 경제 여건이어려운 상황에서 경쟁 환경마저 크게 변화하고 있는 지금, 언제 닥쳐올지 모를 위기에도 대응해야 하는 기업들에 사내유보금은 그야말로 최후의 보루다. 물론, 사내유보금이 정상적인 기업 활동을 위한 투자가 아니라 부동산 투기나 어디에 쓰일 지모를 현금성 자산으로 축적된다면 문제다. 또, 이렇게 행동하는 기업도 아예 없지는 않다. 하지만 과연 이런 도덕적 해이에 빠진 기업들이 얼마나 될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더군다나, 사내유보금의 많고 적음으로 기업들의 도덕적 해이를 판단해서도 안 될 일이다.

작금의 경제 여건이 어려운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다. 또, 그 원인 중 하나가 경제주체들의 강한 화폐애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도 사실인 듯하다. 이런 현상이 죄악시되어 오로지 단죄에만 정책 초점이 맞춰져서는 안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강한 화폐애를 개선하려는 목적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