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에 새긴 나라를 향한 ‘충정심’ 세월에 바래지 않은 ‘숭고한 맹세’ 되었네

발행일 2019-07-10 20: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12> 임신서기석

두 화랑이 돌에 새긴 맹세, 임신서기석...

폭염을 피해 피서도 하면서 요즘 유행하는 인문학에 대한 지식도 쌓으려면 어디로 여행을 떠나면 좋을까.

경주국립박물관 전경.


필자는 주저하지 않고 박물관을 추천한다. 만약 신라 1000년을 살펴보는 역사여행에 관심이 있다면, 10만여 점의 소장품을 지닌 국립경주박물관을 찾는 것도 좋을듯하다.

왜냐하면 경주는 도시 곳곳이 문화유산의 보고이지만, 유물의 전체 면모를 파악하고 각 유물의 퍼즐을 한 곳에서 맞춰보려면 박물관이 적격이기 때문이다.

경주국립박물관 내부.


경주박물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관람객을 반기는 건물이 신라역사관이다.

신라역사관에서 주의하지 않으면 지나칠 수 있는 높이 30㎝의 작은 비석이 오늘 소개하는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다.

주지하듯이 역사를 연구하는 1차사료는 고문서나 금석문이다. 그런데 종이로 된 고문서는 시간의 한계 때문에 현재로부터 가까운 시기의 자료는 남아있을 수 있지만 돌에 새겨진 금석문처럼 1천 년 이상 보존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1천400여 년 전의 금석문으로 추정되는 ‘임신서기석’에는 그 시절의 많은 정보가 고스란히 남아있어 우리로 하여금 관심의 추를 깊게 드리우게 한다.

신라 두 화랑의 꿈과 맹세가 새겨진 임신서기석 탁본. 경주박물관 제공.


◆우연하게 발견한 냇돌이 보물이 된 사연

일제강점기였던 1934년 5월4일. 화창한 봄날에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 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오사카 긴타로(大阪金次郞)라는 일본인이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 석장사(錫杖寺) 터 구릉에 묻혀서 윗부분이 드러난 30㎝ 남짓되는 자연석 냇돌(川石)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 참 신기한 돌이네.”

고고학자로서 예사롭지 않은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지나치지 않고 돌을 캐낸다. 즉석에서 어렴풋이 보아도 빼곡하게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작은 돌을 가져와서 세척하고 상세히 살펴보니 한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그러나 전통적인 한문어법으로 된 글자들이 아니어서,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잘 몰라 그냥 보관하고 있었다.

해가 바뀌어 1935년 12월18일, 마침 당시 역사학계에서 저명한 사학자였던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가 경주분관을 방문했다.

그는 박물관에 수집된 여러 비석 가운데 작은 이 돌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이 돌을 어디에서 발견했지요?”

궁금증을 가진 스에마쓰는 오사카에게 돌의 출처와 발견경위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었다.

돌에 대해 설명을 듣고 면밀히 살펴본 뒤, 임신(壬申)이란 간지(干支)로 글자가 시작되고 내용은 두 사람이 서로 서약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예로부터 작자미상의 빗돌이나 서예작품은 문장의 첫 단어를 제목으로 붙여 온 것을 아는 그는 “이 빗돌의 이름을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으로 합시다”라고 제안한다.

바로 ‘임신’으로 시작되는 문장의 첫 글자를 따고, 문장의 주요내용인 서약을 덧붙여 ‘임신년에 서약을 기록한 돌’이란 의미로 이 냇돌은 ‘임신서기석’이란 임시이름을 얻게 되었다.

스에마쓰는 이 돌에 새겨진 글자를 집중적으로 판독하고 연구하여 이듬해인 1936년 경성제대 사학회지 제10호에 ‘경주출토 임신서기석에 대해서’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이로부터 임신서기석이란 명칭을 얻어 오늘날까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2004년 6월26일 이 냇돌은 대한민국 보물 제141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임신서기석은 경주박물관에서 관객의 시선을 받고 있다.

◆ 임신서기석의 내용과 서예사적 의미

임신서기석은 경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질반질한 자연석 점판암제(粘板巖製)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1411호 임신서기석은 두 명의 인물이 나라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을 새긴 삼국시대 신라의 비석이다. 비석의 첫머리에는 ‘임신’이라는 간지가 새겨져 있고, 5행 74자로 새겨진 내용 중에 충성을 서약하는 글귀가 있다. 경주국립박물관 제공.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길쭉한 형태로 높이가 34㎝, 너비는 윗부분 가장 폭이 넓은 곳이 12.5㎝이다. 두께 약 2㎝의 돌에 1㎝ 정도 크기의 한자(漢字)가 음각으로 한 면에 5줄 74자가 새겨져 있다. 이 작은 자연석 빗돌에 새겨진 내용은 무엇일까.

“임신년 6월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느님 앞에 맹세한다.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충도(忠道)를 지키고 허물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일 이 서약을 어기면 하느님께 큰 죄를 지는 것이라고 맹세한다.

만일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우면 ‘충도’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한 따로 앞서 신미년 7월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곧 시경(詩經)·상서(尙書)·예기(禮記)·춘추전(春秋傳)을 차례로 3년 동안 습득하기로 맹세하였다.

(壬申年六月十六日 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 過失无誓 若此事失 天大罪得誓 若國不安大亂世 可容行誓之 又別先辛末年 七月卄二日 大誓 詩尙書禮傳倫得誓三年)”

비문내용의 핵심은 신라의 두 청년이 나라에 충성을 맹세하고, 유교 경전 학습에 대한 맹세를 기록한 것이다.

특히 신라가 한문을 받아들여 표기수단으로 삼을 때 향찰식(鄕札式) 표기, 한문식(漢文式) 표기 외에 훈석식(訓釋式) 표기가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금석문이다.

예를 들면, 天前誓(하늘 앞에 맹세한다)를 한문 문법에 맞게 쓴다면, 서전천(誓前天)이 되어야 하는 데 우리말식 한문으로 새겨놓았다.

게다가 세속 5계 중의 교우이신(交友以信) 즉 신라 화랑들의 믿음을 맹세한 내용과 우리 민족의 고대 신앙 중 ‘천(天)’의 성격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등 사료적 가치가 높은 금석문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이 빗돌이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관해 여러 설이 분분하다.

처음 빗돌에 관련된 논문을 발표했던 일본인 스에마쓰 야쓰카즈(末松保和)는 명문의 임신년(壬申年)을 통일신라시대 732년(성덕왕 31)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신라에 국학이 설치되어 체제를 갖춘 것이 682년(신문왕 2) 이후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방 후 이병도는 552년(진흥왕 13)이나 612년(진평왕 34)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국학이 도입되기 전부터 중국에서 들어온 유교경전을 화랑과 지식인들이 널리 읽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제시하고 있다.

최근 서예학계에서도 6세기 신라의 다른 비석과 임신서기석의 서체를 비교하여 결구, 장법, 획법, 그리고 명문의 새김방식에서 유사한 특징을 보여주기 때문에 552년 혹은 612년으로 보고 있다.

예컨대 문장형식을 갖춘 신라의 금석문은 6세기 들어서면서 중성리비(501), 냉수리비(503), 무술오작비(578) 등과 같이 대부분 자연석에 새긴 금석문이란 점에서 임신서기석과 비슷하다.

7세기 후반에 무열왕릉비(661)와 같이 귀부(龜趺,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와 이수(螭首, 용(龍)의 형상을 조각하여 수호의 의미를 갖도록 한 비신(碑身)의 머릿돌)를 갖춘 정형화된 개인의 묘비가 출현하는 것으로 보아서 역사다리꼴의 자연석에 귀부와 이수가 없는 임신서기석은 삼국통일 이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임신서기석의 장법(章法, 주어진 지면에 문자를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방법)은 행서의 장법을 취하고 있다.

세로줄은 대충 맞추고 있으나 가로줄은 맞추지 않아 자유스럽다. 글자 크기는 윗부분은 돌 크기에 맞춰 행간(行間)을 넓게 하고 아랫부분은 행간을 좁게 처리했다.

서체는 해서에 예서와 이체자(異體字)가 보이기도 한다. 장법은 6세기의 냉수리비(503), 봉평비(524), 청제비(536) 등과 유사하며, 결구(結構, 글자를 이루는 획의 구성과 짜임)도 광개토대왕비(414), 적성비(551), 명활산성비(551) 등과 유사하여 552년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빗돌의 서예미는 석질에 맞춰 획을 자연스럽게 구사하면서 굳센 필획미가 드러난다. 당시 중국의 글씨와는 다르게 신라만의 질박함을 보여주는 소박한 결구도 세로로 긴 장방형, 납작한 형태 혹은 정방형 등 획일적이지 않아 천진무구해 보인다.

특히 마지막 년(年) 자는 공간을 보공하기 위해 세로획을 길게 처리하여 눈길을 사로잡는다.

◆ 두 화랑의 꿈과 맹세

임신서기석에 등장하는 청년들은 누구일까? 이들은 신라의 화랑이라는 견해가 중론이다.

화랑(花郞)은 글자 그대로 꽃미남을 의미한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기록된 화랑도의 수장은 풍월주(風月主)이다.

풍월주는 540년 처음 설치되어 681년 폐지되었으며, 32명의 화랑에게 승계되었다. 초기의 풍월주는 얼굴이 옥과 같고 꽃처럼 고상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인물이 무척 준수했던 것으로 살펴진다.

후기는 풍채가 좋다거나 태양처럼 빛난다는 인물평이 보인다. 따라서 화랑은 문(文)과 무(武)를 겸비하고, 얼굴은 꽃미남이며 풍채가 출중한 사람으로 오늘날 아이돌 스타에 버금가는 스타였다.

그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도 높아 삼국 가운데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통일을 이룬 원동력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 빗돌에 화랑 두 사람이 맹세한 말을 적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특히 두 화랑은 약속을 할 때 ‘3년’의 기한을 설정하고 하늘에 맹세한다. 그 기념으로 “우리 두 사람의 맹세를 돌에 새기자”고 하면서 빗돌을 세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돌을 보면서 호연지기를 기르며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정진한 뒤, 국가의 간성(干城)이 되었을 것으로 가늠된다.

1천40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들의 숭고한 맹세를 임신서기석을 통해 느끼게 된다.

정태수(서예가·대구경북서예가협회 이사장)


정태수(서예가·대구경북서예가협회 이사장)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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